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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교회음악과 현대교회음악의 관계성IMMANUEL 2013. 8. 19. 15:40
전통교회음악과 현대교회음악의 관계성
백승남
이번 세미나에서 다루게될 전통교회 예배음악과 현대교회 예배음악과 관계성과 현대교회음악(CCM)이 예배음악의 대안일수 있는가 에 대하여 나는 그 초점을 예배의 본질을 이해하고 예배음악을 다루는 우리들의 삶과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것으로부터 풀어가고자 합니다.
1)예배
어떤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 개념을 가리키는 단어를 언어학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입니다. 먼저 영어권의 사람들은 흔히(Worship)를 가치(Worth)와 연결시키데, 그 이유는, Worship의 어원이 되는 고대 영어 단어 weorthscipe의 weorth가 현대 영어 worth에 해당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배는 종종, 가치 있게 여긴다는 에서 “존중” 이나 “존경” 또는 “경의를 포함” 으로 이해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어원을 성서적인 개념의 뜻을 찾는 것은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면이 있습니다.
각 언어는 나름대로의 문법 체계와 의미 체계를 가지고 있고. 그 체계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생활양식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서의 맥락 안에서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모른 채 자기가 속해 있는 문화권의 맥락 속에서 그 단어가 가르키는 개념을 파악하려 한다면 큰 오해가 일어 날 수도 있습니다. 한가지 예로, 우리말의 예배라는 단어를 살펴봅시다.
이것은 “예(禮)”와“배(拜)”라는 두 한자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절하다”를 뜻하는 “배(拜)”예배를 가리키는 성서원어 하와(chawah)나 프로스퀴네오(proskyneo)의 기본적인 뜻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예(禮)”는 원래 “신 앞에서의 바른 행위”를 뜻하는 단어로서 뒤의 “배(拜)”가 하나님과 관련된 행위임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예배(禮拜)라는 단어는 성서 원어의 뜻을 거의 완벽하게 전달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예(禮)"를 유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때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추월적 존재에 별 관심이 없었던 공자는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마음가짐, 즉 다른 사람들을 자비롭게 대하는 마음가짐을 가리키는 “인(仁)”을 사람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인(仁)”의 구체적 표현이 “예(禮)”이며, "예(禮)“를 바르게 행하는 것이 ”인(仁)“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말하자면, 사람들 사이에서 정해진 사회규범을 지키는 것이 바른 삶을 사는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유교의 영향 속에서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 안에는 “사람들에 대한 바른 태도는 바른 예절을 지키는 것”이며 “모임이나 행사를 제대로 가자는 것은 바른 절차를 따라 그 행사를 진행시키는 것”이라는 사고 방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그리고 이 사고 방식, 예배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예배의식을 바르게 수행하는 것”으로 보도록 했습니다.
이런 식의 예배 이해는 다음의 혼돈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결혼과 결혼식은 구분됩니다. 결혼식은 결혼을 위한 예식입니다. 여기에는 신랑과 신부의 입장이 있고 주례사가 있고, 축사가 있고, 광고가 있습니다. 물론 신랑 신부의 행진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결혼자체는 아닙니다. 결혼이란 서로 남이었던 두 남녀가 부부가 되기로 약속하고 바로 그 부부라는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식은 많은 사람이 참석해도 결혼하는 사람은 신랑과 신부뿐입니다.
예배와 예배모임도 이와 같이 구분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며 예배모임은 이것을 위한 예배 자들의 모임입니다. 물론 결혼과는 달리 예배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예배모임의 순서를 다 거치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모임에 제시간에 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졸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모든 순서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축도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모임에 임하신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면 예배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한 예배란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임을 말했습니다.(롬12:1)
예배란 예배 모임이나 예배 의식을 올려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배자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 즉 자신의 전 인격과 삶 전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자가 사진에 대해 늘 발견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졌고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서는 자주 “하나님과 동행한다.” 즉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고 표현합니다.
한국 교회에 있어 70년대 사용되었던 말들은 영접, 거듭남, 구원의 확신, 성령 충만 성령의 은사, 등을 통해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전도 집회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습니다. 한 장소에 한꺼번에 백만 명이 모여 집회를 가진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대형교회가 대부분 이때부터 사람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7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차츰 성경공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에는 몇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요인들은
첫째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과, 신비주의 내지는 경험주의적 논리가 생기면서 일어난 신학적인 혼란 속에 서 그리스도인들은 객관적인 기준을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도인들은 객관적인 기준을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를 들자면 이단들이 준 도전이 있습니다. 특히 이단 때문에 생긴 기독론과 구원론의 혼란은 체계적인 성경공부가 교회에 도입되는 데에 촉진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80년대 중반에 “찬양과 경배” 또는 “경배와 찬양” 이라고 일컬어진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움직임은 이전의 두 운동과 비교할 때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이 운동에 관하여는 사람들은 대개 10대와 20대의 젊은이 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음악을 비롯하여 이런 예술분야와 대중전달매체를 강력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이 때문에 찬양과 경배 운동은 젊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일어난 부흥 운동이나 기독교 문화 운동은 한 과정으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경배라는 단어의 뜻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특히 이 단어가 예배라는 단어와 어떻게 다른지가 의문의 초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스타일이라는 관점에서 찬양과 경배를 이해하려했습니다. 또 한쪽에서는 기존의 설교와 의전중심의 예배와 달리 음악적 요소가 강한 자유로운 스타일의 것으로 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배의 중심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경배를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예배의 중심이 설교와 의전으로부터 찬양과 경배로 옮겨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쨌든, 경배는 대체로 예배와 다른 개념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과 장년층이 함께 참여하는 모임에는 “1부: 경배와 찬양, 2부 예배”와 같은 순서가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예배는 무엇이며, 경배는 무엇입니까? 프로스퀴네오(예배하다), 개혁한글판에서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예배하다 로 번역되었고 요한복음의 저자가 같은 요한계시록과, 사도 행전과 저자가 같은 누가복음에서는 이 단어가 모두 경배하다로 번역되어있습니다. 그것은 개역 한글판 이 번역될 당시 번역자들이 경배와 예배를 일관성 있게 구별하여 쓸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두 단어는 동의어이었다는 것입니다. 영어의 겨우 “예배”에 해당되는 단어는 worship입니다. 그리고 “찬양과 경배”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표현은 praise and worship입니다.
예배와 경배의 구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다르게 보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예배와 예배 모임의 혼돈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산에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주님은 예배의 주변적인 것에 초첨을 맞추고 있는 여인의 눈길을 예배의 핵심으로 돌리고 계셨습니다. 예배가 장소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즉 예배는 종교적인 행사가 아니라 인격적인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예배는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반응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행17:23)라고 쓰여진 제단을 보았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그 도시 안에 예배 대상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누리지 못한 채 그저 예배 행위 자체에 가치를 두고 산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처럼, 그들도 “알지 못하는 것은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가 올바른 예배장소인가부터 시작해서, 언젠가 예배에 맞는 때인가, 어느 것이 적절한 예배 스타일인가, 등에 대해서 열띤 논쟁을 벌이곤 합니다.
예배의 대상과의 인격적인 사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 보이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논쟁으로 전략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찬양과 경배운동은 예배모임에 예배가 회복되도록 일어난, 일종의 예배 갱신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에 관여한 사람들이 경배라는 생소한 단어까지 써가면서 회복되기를 바랐던것이다.
이 운동에는 한국교회의 예배모임 안에 하나님의 영의 임재에 대한 인격적이고도 적극적인 반응이 식어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한하는 쪽으로 흐른 것에 대한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모임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흐르고 성령의 임재에 대한 사람들의 인격적인 반응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열망이 붙출되어 있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이 맞닿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이 흐르는 것입니다. 주일의 전통적인 예배모임이든 다른 날의 찬양과 경배 모임이든, 우리의 모임에서 늘 확인되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2)예배음악
교회음악은 전통예배음악의 상징인 성가대와 CCM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복음성가를 역사적 관점에서 간략하게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주후 500년-900년 사이에 로마 예배의식과 갈리칸 예배의식이 발달한 시기입니다. 그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노래하는 공동체 즉 성가대의 출현과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널리 알고있는 사실가운데, 중세시대 성가대는 남성으로만 구성되었으며 고음역의 노래를 위하여 소년들을 성가대로 영입하게 됩니다. 중세시대의 성가대 제도는 큰 변화 없이 계속되었고, 현대성가형태라고 할 수 있는 혼성합창은 18세기에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성가대가 직업적인 것에서 자원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지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9세기후반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전문적인 성가대의 가창인도자가 발생하게 되었고(혼성4중창단) 이 혼성4중창단은 성가대를 대신하여 찬양하기도하면서 성가대음악 질적 수준향상에 기여하였으며, 이후로 성가대에 독창 자를 두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성가합창을 강조한 웨스트민스터 성가학교 등으로부터 변천되어왔으며 복음성가도 그 과정의 한줄기로, 19세기말 무디(1837-1899)의 복음사역중심으로 나타났습니다.
복음성가의 기원과 특징은 현대 복음성가의 근원은 미국의 부흥운동에서 찾을 수 있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복음주의는 15.16세기의 쯔빙(Zwingli), 루터(Luther), 칼빈(Calvin)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로부터 계승되어 오고있고, 램(Ramm)에 의하면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권위나 전통보다 중요시 여겼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가르쳤습니다.
복음주의에 근거하여 바라보는 복음성가의 원천은 영국 찬송가의 아버지, 복음성가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왓츠(Isaac Watts, 1674-1748), 주관적 찬송가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요한웨슬레(John Wesley, 1703-1791)와 챨스 웨슬러(1707-1788)의 찬송으로부터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한국교회에서 복음성가 사용의 찬, 반론이 어느 정도 대립 되어오고 있는 시점에 복음성가가 처음 소개된 영국에서, 그리고 가장 활발한 복음성가들이 보급되어졌다는 미국에서도 많은 논쟁과 연구 후에 찬송가책에 수록되었으며, 복음주의 교단에서 예배에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지금의 미국교회대부분의 예배음악으로 현대적인 찬양 곡들이 만들어지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새로운 것을 수용할 때 겪어야 하는 변화의 과정임을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의 형식은 주어진 환경과 문화에 따라서 변형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찬송은 왓츠와 쌩키 시대에도 만들어졌고,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주어진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알맞은 다양한 찬송이 만들어져야합니다. 찬송은 예술적인 측면에서 시와 음악의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며 시와 음악은 예술의 한 장르이고, 예술은 항상 시대적 흐름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찬송 또한 새롭게 지어지려는 영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3)CCM과 음악사역자
Contemporary는 동시(짧은시간), 동시대의(넓은공간, 시간), 동시대적(시대와 공감대를 같이 할 수 있는) 이것은 시간개념의 함께 라는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음악 스타일뿐만 아니라 표현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에 적용되어진다는 것에 주시하였으면 합니다. 시대의 흐름을 관찰하고 있는가, 우리 한국사람들 정서 안에 어떤 식의 심성이 흐르고 있는가, 초첨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인가, 10,20대와의 정서와 사고를 염두 해 두고 의사소통(대화 하려하고 있는가)하고있는가,
우리 사회 안에 독특한 것 하나를 말한다고 하면, 새로운 것이 유행하면 유행 아닌 것을 잘 찾아보기가 힘이 들어요. 내가 이태리에서 알게된 한 학생과 대화를 하다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10년이 나도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사회가 인정되면 일부에서 일어나지 전체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사람들의 내면세계에 안정이 있으면 유행에 휩쓸려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음악을 다룰 때 가져야 할 태도라 생각합니다. 종교개혁자 캘빈은 당시 새로운 찬송을 4명의 음악가에서 포크 스타일로 작곡해줄 것을 위촉했고, 루터 역시 당시 포크 스타일로 찬양 곡을 만들어 전도 집회시 사용하였습니다. 미국의 갈보리교회는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교회로 돌아오도록 교회문턱을 그들의 눈높이로 낮추었고 그 결과로 현대예배음악의 모든 순서에 불려진다 고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많은 찬양 곡을 제공한 마라나타 라는 영향력 있는 팀을 탄생시켰다.
캘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는 “포크스타일로 찬양곡을 만들게 한 사람이야”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루터 역시 그를 전통을 무시하고 “새로운 것에 발 빠른 사람이야”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갈보리교회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회심하고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고 그들을 통해서 새로운 예배음악(그들의 문화와 언어로)이 쓰여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미국교회음악의 대안이었으리라고는 그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전통의 아름다움을 보전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다양함으로 달라도 되는 것을 존중해줄 때 청소년들과 장년들과의 문화차이의 거리도 예배음악의 조화도 누구에게나 동등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처럼 세대를 넘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한마음으로 예배하며 찬송하는 날이 좁혀질 것을 기대합니다.
끝으로 음악이 구원의 길인가? 음악이 진리인가? 음악을 훌룡하게 만들고 연주하면 그 음악가의 삶도 훌룡합니까? 단지 음악은 구원의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전하는 좋은 도구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 교회음악의 대안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불러지는 것에 있습니까?
예배 가운데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음악이 회복되는 것은 음악스타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음악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 교회음악을 준비하고있는 학생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성가대 지휘자, 예배인도자, 성가대 대원, 찬양사역자들 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말씀 안에서 훈련되어져야합니다. 찬양의 대상이 회중에 있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 또한 한순간도 놓쳐서는 안됩니다.
더 이상 교회를 일반음악 연주회장으로 만들지 맙시다. 이 자리에 참석한 교회음악을 공부하고있는 학생들과 한국교회음악의 발전에 관심과 염려의 시선을 아끼지 않은 분들의 기도와 열심히 하나님 앞에 결단되어지고, 헌신되어질 때 한국교회 예배음악의 내일이 분명하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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