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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용어 개정안 해설 (장로교 통합측)IMMANUEL 2011. 4. 4. 18:27
기독교용어 개정안 해설-2(통합측, 87회 2002년)
1. 천당(天堂) 하나님의 나라, 천국, 하늘나라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 간다.", 또는 죽은 사람을 가리켜 "천당에 갔다." 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천당'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성경에는 물질로 된 유형의 집 또는 공간으로 이해하기 쉬운 천당의 개념이나 서술이 없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이 땅의 종교 문화를 형성한 타종교에서 유래된다. 한민족의 일반적인 종교개념이나 사전적 풀이에서는 천당을 "하늘 위의 신의 궁전"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극락세계인 정토(淨土), 즉 깨끗한 국토, 곧 부처와 보살이 사는 번뇌의 굴레를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을 천당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천당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교도들이 즐겨 쓰는 '천당'이라는 어휘보다 한글성경에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만이 온전히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 '하늘나라'로 사용함이 적절하다.(제87회 / 2002년)
2. 입신(入神) 사용불가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로서 기도하는 열심은 매우 소중한 특성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한 기도생활은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를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각각 달리 경험하게 한다. 그러는 중에 여러 형태의 은사를 받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신학적인 기초가 다져지지 않은 기도원 등에서 기도에 집중하다가 "입신(入神)"을 했다는 말을 예사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입신(入神)이란 무속종교의 표현으로서 무당에게 신이 내려 인간으로서의 자아의식을 상실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사전에서는 입신(入神)을 한 인간이 영묘(靈妙)한 경지에 이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신의 경지에 이름" 이라고 풀이한다.
이러한 표현은 천주교가 주로 사용한 공동번역의 민수기 11장 25∼27절에서 유일하게 사용했을 뿐 본 교단이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개역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영을 내리실 때" 또는 "영이 임하실 때"로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그 분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입신(入神)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용어이다.(제87회 / 2002년)
3.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사용불가
기도하는 중에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영원히 존재하시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살아있다는 표현은 '언젠가는 살아있지 못할지 모른다' 또는 '아직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등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극히 제한하는 표현이 된다.(제87회 / 2002년)
4. 룻기서, 욥기서, 잠언서, 아가서 룻기, 욥기, 잠언, 아가
룻記書, 욥記書, 箴言書, 雅歌書 등으로 말하거나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 자체에 記, 言, 歌 등이 있어 '書' 자가 의미상 과잉표현(redundancy)이 되므로 그렇게 쓸 수가 없다. '創世記' 나 '출애굽記' 에 '書' 자를 붙여 '創世記書'로나 '출애굽記書'로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啓示綠'에 '書' 자를 붙일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말 성경이 바로 쓰고 있으며, 같은 한자를 중국어나 일본어 성경 책명에서 그렇게 쓰지 않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제87회 / 2002년)
5. 시편 장 절 -> 시편 편 절
많은 사람이 시편의 장 절을 나타낼 때, 시편 몇 장 몇 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몇 장과 몇 절은 산문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의 구분을 신·구약의 다른 책의 구분을 나타내는 '장' 과는 달리 '편'을 쓰는 것은 같은 한자를 쓰는 중국어 성경이나 일어 성경에서도 우리나라와 같다.(제87회 / 2002년)
6. 하나님의 몸 된 교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하나님의 몸 된 교회'란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와의 관계에서 비유적으로 지칭하는 말이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온 몸의 지체가 머리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것과 같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교회론의 한 단면이다. 그는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을 결합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천명하고 있다.(엡 1:20∼23) (제87회 / 2002년)
7.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설교용어)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시는 하나님(기도용어) -> 사랑하는 하나님
설교를 할 때 흔히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라고 하는 말은 말하는 이가 그 동사 '사랑하시는'의 주체가 될 때에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말하는 주체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존대를 나타내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기도를 할 때에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란 말도, 그 '사랑하시는'이란 동사의 주체를 말하는 이 자신을 가리키는 뜻으로 말하는 경우라면, 즉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라면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옳지 않다.
이러한 말을 하는 경우를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의미는 흔히 '사랑하시는 시민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경우처럼 그 사랑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고 말하는 이(화자)인 것이 분명하다. 만일 사랑하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라 해야 분명하다.(제87회 / 2002년)
8.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 -> 주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사도신경 외우겠습니다.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겠습니다.
"다같이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예배시에 성도들은 결코 주기도문을 단순히 외는(외우는) 것, 즉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 한 마디 뜻을 바로 새기면서 음송(吟誦)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른 표현은 "다같이 주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
"다같이 사도신경 외우겠습니다"라는 표현도 그와 같은 경우로서 옳지 않다. 즉 "다같이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주기도문을 외운다"라는 표현이나 "사도신경을 외운다"라는 표현은 그 자체가 주기도나 사도신경을 진지하게 뜻을 생각함이 없이 형식적으로만 소리내어 외는 행위이다.(제87회 / 2002년)
9. 중보기도 -> 중보적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기독교에서 "중보"라는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는 단 한 분의 중보자이시다.(딤전 2:5) 그러므로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과 다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계시고 성육신 이전에도 선재(先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중보자이셨다.(요 1:3,10; 골 1:16; 히 1: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행위가 가장 명백하고 독점적으로 드러난 곳은 바로 십자가에서의 구속사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보는 이미 완성된 구속의 역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구속의 열매에 동참하고 있는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끊임없이 의존하며 살아간다. 예컨대, 믿는 자들이 드리는 감사와 기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려진다.(요 14:14; 롬 1:8; 골 3:17; 히 13:15)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눅 22:69; 골 3:1; 히 12:2)
하늘에서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요한 일면은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롬 8:34; 히 7:25)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종말에 있게 될 부활과 심판의 때에도 계속될 것이다. 즉 부활과 심판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다.(요 5:28∼29, 고전 15:22, 52∼54; 살전 5:16; 마 25:31∼46; 요 5:27; 행 17:31)
그러므로 중보기도라는 표현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며, "이웃을 위한 기도", "중보적 기도", 라는 표현으로 사용함이 적절하다.
중보적 기도는 중보자의 기도(중보기도)와는 다른 "나" 아닌 "남"을 위한 기도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제87회 / 2002년)
10. 제사, 제단, 제물 -> 예배, 성단, 예물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소나 양을 잡아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제물의 피를 단에 뿌린 뒤 그것을 불살랐다. 이것이 곧 레위기의 제사요, 이 단이 바로 모세의 제단이며, 죽임을 당한 소나 양들이 희생의 제물이었다. 이 제사는 마침내 모든 제물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완성되었고, 신약시대에 들어 예배로 내용과 형식이 변화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한국교회는 지금도 예배를 제사의 의미로 이해하며 다음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리게 하옵소서.", "기도의 제단에 나와서, 작은 제물을 바칩니다."
한국 문화의 특징으로서 제의적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는 점을 지적한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신화, 민속, 종교의식 등이 모두 제단 근처에서 성육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구약의 제사용어를 예배 속에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부자연스러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한국교회 역시 제의적인 문화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제사는 '예배'로, 제단은 '성단'으로, 제물은 '예물'로 바꾸어야 한다.
한편, 제단을 '강단'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으나 이것은 성례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설교만 이루어지는 단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므로 '성단'이라 함이 적절하다.(제87회 / 2002년)
11. 영시(0시)예배, 자정예배 -> 송구영신예배
영시(0시)는 하루가 끝남과 동시에 또 하루가 시작되는 밤 12시 정각, 곧 자정을 가리키는 시각이다. 교회가 이 시각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한 해가 지나가고 다시 시작하는 연말연시의 자정에 국한된다. 그러므로 연말연시의 0시에 드리는 이 예배를 영시예배나 자정예배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예배는 감리교회의 존 웨슬리가 언약갱신예배(Covenant Renewal Worship)라는 이름으로 소개하였는데 새로운 해를 맞아 하나님 앞에 언약을 세우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예배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날짜의 특성을 강조하여 야성회(Watch Night Worship)라는 이름이 나왔고, 한국교회에서는 단순히 시각만을 앞세워 0시예배라 부르고 있다.
예배가 시작되는 시각을 예배의 명칭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낮11시예배, 밤7시예배가 예배의 이름이 될 수 없듯 0시예배 역시 마찬가지다. 또, 0시는 예배 시작 시각도 아니다. 교회에 따라 밤 11시나 11시30분에 시작하여 고백의 시간을 갖고 새 언약을 세우는 중에 새해를 알리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일을 가리켜 '송구영신', 또는 '송영'이라 한다. 이 의미가 예배의 성격 및 내용과 일치하므로 '송구영신예배'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송영'은 '송구영신'의 준말이지만, 찬양에서의 '송영'과 동음이어서 혼란을 가져올 우려가 있으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제87회 / 2002년)
12. 수양회 -> 신앙수련회
절기가 바뀌면 교회마다 행사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특히 기도원이나 수양관이 있는 교회는 그 장소를 활용하여 행사를 펼치는데 그 내용이 점차 새로워지고 다양해져 말씀집회, 찬양콘서트, 각종 이벤트, 세미나와 워크숍 등을 포함하게 되었다.
아무리 수양관에서 행사를 치른다 하더라도, 이런 행사를 전통적 용어인 수양회라고 부르기에는 이미 그 성격이 크게 바뀌고 말았다. '수양'이란 도덕적 품성을 닦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소극적이고 정적인 느낌을 주는 이 용어를 가지고서는 현대의 다양한 행사 내용을 다 담을 수 없다.
교회의 공동체 훈련이라는 목적을 잘 드러내면서 다양한 행사를 포괄할 수 있는 용어로 '신앙수련회'가 적합하다. '수련'은 마음과 몸을 잘 닦아서 익힌다는 사전적인 뜻을 갖고 있으며, 특히 정신을 닦고 기르는 데 사용하는 종교적 용어로도 익숙하다. 여기에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한 뚜렷한 목표를 앞에 내세우게 되므로 가장 합리적인 명칭이다.(제87회 / 2002년)
13. ...... 기도로 폐회합니다 -> ......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 기도로 기도회를 마칩니다.
예배가 끝날 즈음해서 예배 인도자가 이제 "..,목사님 축도로 폐회합니다", " ..,장로님 기도로 폐회합니다" 또는 " ..,집사님이 폐회기도를 해 주시겠습니다"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교회 안의 각종 회의에서 그 회의가 끝날 무렵 의장이 " ..,장로님의 기도로 폐회합니다", "폐회기도를 .., 집사님이 해 주시겠습니다"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무의식중에 예배에서도 사용한 것으로 예배가 회의가 아닌 이상 반드시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주일날 드리는 주일 낮 예배는 물론 새벽기도회나 수요기도회, 금요밤 심야기도회 등도 비록 우리가 관례를 따라 회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바로 예배의 일종이므로 이 때에도 " 의 기도로 폐회합니다"와 같이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교회 밖 어느 곳에서 드리는 예배든지 예배가 끝날 때 위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은 안 된다. 예배는 어느 경우나 ' 회'가 아님을 분명히 새겨둘 필요가 있다.(제87회 / 2002년)
14. 예배의 시종을 의탁하옵고 -> 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 - 기도로
예배드릴 때 기도 인도자가 기도의 마무리를 하면서 '예배의 시종을 하나님께 의탁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와 같은 표현을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예배의 시종을 하나님께 의탁드리며'는 바람직한 표현이 못된다.
의탁은 '어떤 것에 몸이나 마음을 의지하여 맡긴다'는 의미다.
내가 주도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거의 '그가 대신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응답의 행위인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이 예배를 도리어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방관자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이 예배를 하나님께 의탁하면서'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필요할 시는 "이 예배를 주장하시고" 또는 "이 예배를 성령님께서 인도하시고"로 쓸 수 있다.(제87회 / 2002년)
15. 태신자 -> 전도 대상자
생소한 용어가 교회 안에서 쓰이고 있는 것을 보는데 바로 '태신자'가 그것이다.
이 말은 믿지 않는 어느 사람을 지칭하면서 장차 태어나게 될 신자라는 의미로 즉 태안에 들어 있는 신자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전도해서 꼭 신자를 만들겠다고 속으로 작정한 어떤 특정한 사람을 '태신자'라고 하고 있다.
임산부의 태 안에 들어 있는 생명체를 태아라 부르는 것에 연유하여 태안에 들어 있는 신자라는 뜻으로 '태신자'가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부적합한 용어이다. 태아가 임산부의 몸 속에 들어 있는 생명체일진대 그러면 '태신자'는 과연 누구의 뱃속에 들어 있다는 말인가.
만일 '태신자'를 용납한다면 장차 목사나 장로가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그 사람을 '태목사', '태장로' 라 해도 괜찮다는 무리한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태신자'라는 용어대신 '전도 대상자'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제87회 / 2002년)
16. 안집('안수집사'의 줄임말) -> 사용불가
집사는 교회의 택함을 받고 안수하여 임직한 이들을 가리키는 직분인데, 서리집사와 구별하기 위하여 안수집사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그 명칭을 줄여 '안집'이라는 생소한 말로 부르거나 기록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이는 사회에서 유행을 타고 있는 두문자어(acronym) 사용이 교회에 스며들어온 결과라 하겠다. 신문과 같은 활자매체는 지면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되도록 줄여 쓰기 위한 목적으로 무리한 약어를 만들어낸다. 이런 현상이 간결한 것을 선호하는 현대인들의 성향과 맞아 떨어져, 단체이름 줄여 말하기(예, 나라사랑실천본부 나사본), 일상어 재미있게 줄이기(예, 바라보고 싶은 사람과 천하에 재미없는 사람 바보와 천재) 등 언어생활에 혼란을 줄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교회에서도 직분의 호칭을 줄여 말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대표적인 것이 부목사를 '부목'이라고 부르는 경우인데 이는 교목, 군목, 경목 같은 준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의미가 통하고 있다. 그러나 안수집사를 '안집'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무리한 줄임말이다. 만약 이런 두 문자어를 받아들인다면 원로목사를 '원목', 은퇴장로를 '은장'이라 부를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동의어가 양산되고, 어감이 이상해지며,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의 위화감을 조성하게 되는 것이 줄임말의 폐단이다. 교회 공동체의 순수성을 해칠 우려가 있는 '안집' 같은 생소한 두 문자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제87회 / 2002년)
17.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 주님 안에서 문안합니다. 주님 안에서 문안드립니다.
'이름'은 누구를 대신하여 부르는 말 또는 누구를 대신하여 지시하는 말이므로, 그 사람의 권위와 인격의 임재를 동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의 이름으로 무엇을 한다'고 말할 때, 그 서술어는 권위와 위엄과 인격의 동반을 의미요소로 하는 용어이어야 한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이름은 더할 수 없는 권위와 위엄과 인격과 능력을 동반하는 것이므로 단순히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다는 뜻인 '문안'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것은 어색하다. 다시 말하자면, '문안'이라는 행위는 '예수님 이름을 대신하여' 혹은 '예수님 이름을 빌어서' 비로소 성립되는 것일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또한, '이름으로'에 쓰인 격조사 '-으로'는 '수단, 방법, 도구, 기구' 등을 나타내는 말이므로 '누구의 이름으로 문안드리다'라는 표현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대안으로, '주님의 이름으로'는 '주님 안에서' 또는 '주 예수님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등으로 바꾸어 쓰는 것이 좋다. 성경에는 문안이나 감사나 부탁을 할 경우 거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로 기록되어 있다.(롬 16:10, 고전 1:4, 딛 3:15) (제87회 / 2002년)
18. 일요일(공일) -> 주일
그리스도인은 일요일(공일)을 '주의 날'(계1:10)을 뜻하는 주일이라고 해야 한다.
현재 총회 헌법의 예배와 예식에 주일이 안식일과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별도의 검토와 연구가 필요하다.(제87회 / 2002년)
그리스도인들이 쓰기에 바람직하지 못한 용어
현재 우리 생활 속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말들 중에 다음과 같은 말들은 무속, 토속신앙, 도교, 불교 등의 사상이나 교리가 담겨져 있는 말들로 우리 기독교 신앙과는 맞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용어 사용을 피하는 것이 좋다.
1. 도로 아미타불
고생만 하고 아무 소득이 없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본래는 중이 평생을 두고 아미타불을 외우지만 아무 효과도 없다는 뜻에서 왔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쓰기에는 바람직하지 않다.
2. 공염불(空念佛)
본래 불교와 관계된 말로 신심(信心)이 없이 입으로만 외는 헛된 염불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가급적 이 말을 피하는 것이 좋다.
3. 보살 같다.
보살의 뜻은 '위로 부처를 따르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의 버금이 되는 성인'이라 되어있는데 아주 성품이 좋은 사람을 일컬어 '보살 같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쓰기에는 적합한 말이 못된다.
4. 부처님 가운데 토막
음흉하거나 요사스러운 마음이 전혀 없고 마음이 지나치게 어질고 순한 사람을 가리켜 '부처님 가운데 토막'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피해야 할 말이다.
5. 신선놀음
신선이란 도를 닦아서 인간 세상을 떠나 자연과 벗하여 늙지 않고 죽지도 않고 오래 오래 산다고 하는 초월적인 상상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편안한 삶을 가리켜 '신선놀음이다'라고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쓰기에 적합한 말이 못된다.
6. 도사(道士)
어떤 일에 도가 트여서 능숙하게 해 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이 도사란 본래 도교에서 도를 갈고 닦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우리는 성직자나 직분자에게 이 말을 비유하여 쓰는 것은 삼가야 한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 길 찾는 데는 도사야'와 같은 말은 해서는 안 된다.
7. 신주(神主)모시듯 한다.
신주란 사당 등에 모시어 두는 죽은 사람의 위패를 말하는데 글자 그대로 죽은 사람을 신으로 받드는 민간 신앙에서 온 말로 몹시 귀하게 여기어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다루거나 간직하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신주 모시듯 한다'라고 하는데 우리는 가급적 이런 말은 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8. 명당(明堂) 자리
명당이란 민간 신앙의 풍수지리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후손에게 장차 큰 복을 가져다 준다는 묏자리나 집터를 말하는데 이는 우리 기독교 신앙과 어긋남으로 쓰지 않아야 된다. 예를 들어 '여기는 정말 명당자리다'와 같은 말을 쓰는 것은 피해야 한다.
9. 넋두리
민간 신앙에서 굿을 할 때 무당이나 가족의 한 사람이 죽은 사람의 넋을 힘입어 그 넋을 대신하여 말을 하는 것을 일컫는 것으로 불만이나 신세타령을 길게 늘어놓으며 하소연하는 말을 가리켜 넋두리라 하는데 이런 말은 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10. 도깨비 장난
민간 신앙에서 도깨비란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인데 이 도깨비는 비상한 힘과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을 홀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이나 심술궂은 짓을 많이 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 도깨비와 관련된 '도깨비 장난', '도깨비 짓', '도깨비 불'과 같은 허무 맹랑한 술어를 쓰지 않는 것이 좋다.
11. 일진(日辰)
날의 간지(干支)를 말하는데 이에 따라 그 날 그 날의 운세가 있다고 믿고 있다. 용례로 '일진이 나빠서', '일진이 사나워서'와 같은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피해야 될 말이다.
12. 살(煞)
민간 신앙에서 살이란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깨뜨리는 모질고 독한 귀신의 기운을 말한다. '살이 낀다', '살을 푼다', '살이 내린다' 와 같은 말들을 우리는 쓰지 말아야 한다.
13. 귀신같다(이다).
귀신을 미화해서 어떤 일을 잘 알고 있다든지 또는 아주 잘 할 경우 이를 '귀신같다', '귀신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피해야 될 말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을 이 귀신에 비유하는 것 즉 '김 장로님이 귀신같이 알아 맞추시네'와 같은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
14. 액(厄)
액이란 '모질고 사나운 운수'라는 뜻인데 '액이 닥친다', '액을 물리친다', '액땜을 한다'와 같은 말은 우리가 피해야 될 말이다.
15. 운수(運數), 운(運), 수(數), 재수(財數)
운수, 운, 수는 같은 말로 사전적인 풀이는 '이미 정하여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天運)과 기수(基數)'를 뜻하며, 재수란 '재물이 생기거나 좋은 일이 있을 운수'라는 말인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가급적 이런 말들을 피해야 한다. '운이 나쁘다', '운이 없다', '운수 사납다', '재수 있다', '재수 없다' 등과 같은 말들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16. 사주팔자(四柱八字)
사주팔자란 '사람이 타고난 한 평생의 운수'를 말하며 이를 줄여 '팔자'라고도 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믿는 우리는 이와 같은 말을 써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사주팔자를 잘 타고났다', '팔자가 기구하다'와 같은 말을 우리는 쓸 수 없다.
17. 터줏대감
민간 신앙에서 터주란 '집터를 지키는 지신, 또는 그 자리'를 말하는데 가마니 같은 것 안에 베 석자와 짚신 따위를 넣어서 달아 두고 위한다. 이 터주에 관련된 말로 집단이나 구성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람을 가리켜 '터주대감'이라 하는데 이 말은 우리가 가급적 쓰지 않는 것이 좋다.
18. 손
민간 신앙에서 손이란 날짜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여 따라 다니면서 사람의 일을 방해하는 귀신을 뜻하며 초하루와 이틀은 동쪽, 사흘과 나흗날은 남쪽에 있다고 하며, 9일과 10일에는 손이 없는 날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 날짜를 따져서 '내일은 손이 없는 날이니 이사를 하자', '내일을 손이 있는 날이니 이사하지 말자'와 같은 말들을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말들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를 따르는 것도 안 된다.
19. 운명
운명이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를 말하는데 우리는 이런 뜻을 가진 '운명'이란 말을 써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운명에 맡기다', '모든 것이 운명에 달려 있다' 와 같은 말을 우리는 쓰지 않아야겠다.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글쓴이 : null 원글보기메모 :'IMMANU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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