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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것이 바로 식민주의선교(植民主義宣敎)가 아닐까? 식민주의선교(植民主
    IMMANUEL 2010. 8. 11. 11:42

    이것이 바로 식민주의선교(植民主義宣敎)가 아닐까?



       지금 한국교회는 미국교회 다음으로 지구촌 방방곡곡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노라는 자화자찬에 가까운 자부심과 긍지로 한껏 고무되어 있다. 지구촌교회들이 모두 한국교회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기라도 하는 듯한 착각 속에 은근한 자랑으로 가득채워져 있다. 그래서 필자가 '아직도 식민주의선교란 말인가?'란 글을 발표한 것에 대하여 가당치도 않는 말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듯 하다.

       최근 한국교회는 '2010 선교한국'이라는 젊은이들을 위한 선교동원 큰 잔치가 있었다. 올해는 동남아지역의 모 나라에서 한국교회의 '선교한국'에 대한 열의를 직접 체험하며 배우겠노라며 참관단읊 파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마다 열리는 젊은이들을 위한 선교동원 큰 잔치로 '선교한국'만한 집회는 없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해마다 반복되는 '선교한국' 대회에서 헌신한 청년 일꾼들이 제대로 양육되어 선교동원에 활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정녕 저들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다는 믿음이 없어서이다. 단순히 떠뜰썩한 연례행사로 전락된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도 식민주의선교인가?'라는 글을 발표한 이유가 있다. 한국교회의 선교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오히려 선교한국을 위한 한국교회가 제자리를 찾기를 원할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것은 시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쓴 글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한국교회가 식민주의선교가 아닌 진정한 선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국교회의 무엇이 식민주의선교냐?'라고 반문하는 듯 하다. 따라서 내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게 된 이유를 밝혀야 할 필요를 느꼈다.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하기로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을 밝히고 싶지만, 그러면 글이 또 너무 길어질 우려가 있기에 간략히 요약한 내용이다.

       첫째, 현지교회와 무관한 선교다.

       오늘날의 지구촌에는 '복음의 불모지'는 없다. '복음의 황무지'가 있을 뿐이다. '복음의 불모지' 는 '복음이 전해져도 그 복음이 전혀 자랄 수 없는 곳'이다. 그렇지만 '복음의 황무지'는 '이미 복음이 전해졌던 옛 역사가 있거나 현재 복음이 전해진 곳으로 그 복음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곳'을 가리킨다. 이런 곳을 선교학적으로는 '창의적 접근지역'이라고 뷴류하기도 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복음의 황무지게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저들은 서방선교사와는 다르게 저돌적이고 공격적이어서 두려움을 모르고 과감한 선교에 정진한다. 다소 신중하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들의 선교활동은 칭찬할 만한 일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다른 현편으로는 과감한 활동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발전하여 역반응을 초래하게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도 가볍게 여겨지지 않아야 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교회가 이런 일을 대체적으로 간과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현지교회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저들과의 협력이나 동역을 무시한채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예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한국교회가 본디 독립심이 강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정당하지 못한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현지교회와는 상관없는 한국교회만의 독립적 아성을 세워가는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고 있다.

       이런 일을 일으키는 한국교회는 한국적인 방법을 선호하여 현지인들에게 한국적인 방법의 전이를 무차별로 강요한다. 그래서 심지어 현지인들에게 우리말 찬송과 기도를 강제로 가르치기도 한다. 현지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고 하는 의도가 아니다. 한국적인 신앙의 전수를 위한 발판쯤으로 이기고 있는 것만 같다. 이는 마치 한국어로 찬송하고 기도해야 하나님이 더 잘 들으시는 것으로 착각이라도 하고 있는 듯이 비쳐지고 있다.

       한국교회적인 것이 가장 우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현지인의 문화와 생활환경은 무시된 채 한국적인 문화와 생활을 저들에게 길들이는 것이 좋은 선교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것이야 말로 식민주의선교가 아니고 무엇이랴. 현지문화를 모르고 생활을 모르면서 무조건 한국적인 방법을 일방적으로 전이하려고 시도하는 선교방법은 마땅히 근절되어야 할 방법이 아닐까?

       현지교회와 무관한 선교추구. 그것은 분명 위함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생각은 현지교회를 형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자기 영역을 세우는 일에 고집을 부리는 식민주의선교의 원형적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깨달아야 한다.

       둘째, 한국적 신학교의 난립이다.

       한국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선호하는 사역은 신학교를 세우는 일이다. 명분은 분명하다.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하여 배출하려면 신학교만한 사역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신학교를 세우는 일에 전력을 다한다. 정말 그럴까? 현지인 지도자를 세우는 일은 신학교를 세우는 일이 최선일까? 어떤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지도자가 양성되는 것일까? 물론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로 여기는 것도 착각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교회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적정한 때에 신학교는 세워져야 한다. 그때가 되기까지는 현지인과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삶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자꾸만 신학교를 세우는 일에 급급하다면,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삶은 위장이 어렵지만, 학습은 얼마든지 위장이 가능하다는 점을 간과하지 못해 일어나는 결과다.

       한국교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선교사마다 성급하게 신학교를 세운다. 성급하게 세워지는 신학교마다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된다. 이런 신학교는 결국 한국적인 신학교의 흉내를 내고, 한국교회의 지도와 감독에 배속되어 결코 한국인이 될 수 없는 현지인들을 짝퉁 한국인으로 만들어내는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이런 짝퉁 한국인 교회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야 말로 식민주의선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셋째, 독자적인 선교노회나 총회의 구성이다.

       한국식 신학교를 세워 한국식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을 어찌 탓 할 수 있으랴.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후에 발생한다. 현지교회와 교류가 없는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신학교를 운영하여 배출하게 된 이들에 대한 처우문제다. 저들을 현지교회가 지도자로 인정하고 받아주면 문제는 최소화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적 신학교를 운영하는 이들이나, 현지교회는 상호 인정과 교류를 처음부터 거부한 까닭에 졸업생들의 처우문제는 당면문제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저들을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계속적으로 자기들의 영향권 아래 붙잡아 두길 원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한국교회의 이름으로 저들에게 안수를 하고, 저들을 규합하여 하나의 조직으로서 노회나 지방회를 구성하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구성된 노화니 지방회는 한국교회의 통제와 지도 및 감독을 받도록 체제화시키고 있다.

       이런 이들이 서서히 숫자가 늘어나면서 지금은 점차로 한국교회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는 현지인 총회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머지 않아 선교현장에서 한국적 총회가 구성될 날이 이를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야 말로 식민주의선교의 소산이라고 함이 마땅한 것이 아닐까? 현지인들의 자주권을 철저하게 담보로 잡아 한국교회의 취향에 맞는 현지교단을 구성하겠다는 의도야 말로 진정한 식민주의선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랴.

      넷째, 사제관계의 종속이다.

       사제관계란 '가르치는 스승과 배우는 제자의 관계'를 의미한다. '종속'이란 '
    자주성이 없이 주가 되는 것에 딸려 붙는 것'을 의미한다. 사자관계는 종속이 아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이런 관계는 서로의 인격적 신뢰를 가져야 한다. 배움을 받은 자는 자기를 가르치거나 가르쳤던 이를 존경하며 따라야 하고, 가르치거나 가르쳤던 자는 자기에게 가르침을 받았거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이들을 상하적 종속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인격관계를 이뤄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의 영향력을 받은 선교현장에서는 이런 사제관계가 일어나지 않고, 사제의 종속이 일어나고 있다. 미치 한 번 자기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영원히 자기가 가르친 가르침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여겨 계속 자기의 권위 아래에 있어야 할 듯이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지 이른 바 자기의 사람으로 삼으려 한다. 도무지 예수님께서 '너희는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고려치 않는 듯이 행동한다.

       이런 이들에게는 제자가 선생을 능가하는 일이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깨달음의 발전을 기대하지 않는다. 오직 종속되는 사제관계 속에서 통제와 지도, 그리고 감독이 필요할 뿐 저들과 협력이나 동역이란 바라지도 않을 뿐더러, 일어나서도 안된다. 이런 일이야 말로 참으로 식민주의선교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않겠는가?

       이제 글을 끝내려 한다.  

       앞에서 언급한 사례들은 한국교회의 지구촌 선교현장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런 일들은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보펹거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래서 나는 '아직도 한국교회는 식민주의선교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참으로 바라기는 더 이상 한국교회의 세계선교가 식민주의선교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현지인을 위한 방법으로 전환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런 기대가 있기에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이런 글을 쓸 이유도 없었으리라. 하여, 더 이상은 지구촌 선교현장에서 한국교회에 의해 식민주의선교가 자제되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진정한 서교한국의 역사가 아름답게 전개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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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8. 10 (화)    글/ 불꽃 石一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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