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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명성황후 시해범 후손들 `110년만의 사죄`
    Historic spot 2018. 9. 3.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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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일 방한해 홍릉ㆍ생가 방문예정, "日교과서 시해사실 기술" 촉구
    2005.05.10 07:26l 최종 업데이트 2005.05.10 07:52l
     
    (서울=연합뉴스) 이종호 기자 = 명성황후 시해사건 발생 
    110년 만에 처음으로 시해범들의 후손이 한국 땅을 찾아와 사죄를 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내 명성황후 처소인 건청궁(乾淸宮) 옥호루(玉壺樓)에 난입,

     

    황후를 시해했던 범인 48명 가운데 구니도모 시게아키(國友重章)의 손자 가와노 다쓰미(河野龍巳.84) 씨와

     

    이에이리 가가치(家入嘉吉)의 손자며느리 이에이리 게이코(家入惠子 ) 씨, 그리고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회원 10명 등 모두 12명이 9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이들은 서울 중구 필동 한국의 집에서 대화 모임을 갖고 "우리는 진정한 사죄를 하러 왔다.

     

    이제 시작이다"라며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했다.


     
    이제까지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 정부와 민간을 막론하고 사죄나 유감 등 어떤 반응도 보인 적이 없었다.
    이들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기록한 일본 역사교과서는 단 한 종뿐이나 이마저 최근의 우경화 분위기에 밀려

     삭제될 위기에 처해 있다"면서

    "앞으로 교과서들이 이 사건을 기술하도록 시민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말했다.
     
     
    가와노 씨는
     

     "오늘 아침 출국에 앞서 가족묘를 찾아 '할아버지가 지으신 죄를 대신 씻으러 한국에 갑니다'고 말씀 올렸다"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어서 좋은 곳에 가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을 느껴왔다"고 말했다.
     
     
    다도 전문가인 이에이리 게이코 씨는 "제 방식대로 명성황후께 사죄하기 위해 묘소에서 극진한 정성으로 차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 함께한 

     

    최서면(崔書勉.77) 

    명지대 석좌교수(전 도쿄 한국문화원장)가 
    "일본은 이제까지 말로만 사과했을 뿐 진정한 행동을 보이지 않아 사과의 횟수만 늘어났다"면서 "당신들처럼

     

    진심으로 사죄하는 일본인과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자"며 악수를 청하자 가와노 씨는 눈물을 흘리며 최 교수의 손을 잡았다. 

     

    최 교수는 "명성황후의 국장이 여러 차례 연기된 것은 시해범의 목을 베어 황후에게 바치기 전에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고종의 의지 때문이었다"며 많은 자객이 일본에 밀파됐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친일파 우범선(우장춘 박사의 부친)을

     

    암살하는 정도에 그쳤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한편 지난해 11월 양심적인 전직교사 20여 명이 모여 결성한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을 주도하고 있는 
    가이 도시오(甲斐利雄.76)

    는 지금까지 자객들의 후손 14명을 확인하는 한편,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칼을 두 집안에서 발견하는 등  각종 기록과 자료를 속속 발굴 중이라고 밝혔다. 
    또 후쿠오카(福岡)의 한 사찰에서는  한 시해범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만들었다는 명성황후의 석조상도 발견됐다고 가이 씨는 전했다. 

     

    그는 이 모임이 구마모토(熊本)에서 결성된 데 대해 "시해범 48명 가운데 20여명이 한성신보 기자와  직원 등 구마모토 출신이다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들의 방문은 근현대사 민족 문제에 관한 영상기록물을 다수 제작해온 정수웅 감독(다큐서울 대표)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성사됐다.

     

    정 감독이 작년 11월부터 제작 중인 다큐멘터리 '명성황후 시해사건, 그 후손들 110년 만의 사죄'는  조만간 52분짜리 2부작으로 완성돼 SBS와 일본의 한 TV 방송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이들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 소재
     고종-명성황후 합장묘인 홍릉과 여주에 있는 
    황후 생가, 

    시해사건 현장을 찾아 사죄의 예를 갖춘 뒤 12일 돌아갈 예정이다.
     
     
    yesno@yna.co.kr" target=emptyframe>yesno@yna.co.kr

    國母 明成皇后(국모 명성황후)의

     
     
    "명성황후께 할아버지 대신 진심으로
    사죄하겠다"

    <연합인터뷰> 명성황후 시해 자객의 손자 가와노씨
     
    (서울=연합뉴스) 이봉석 기자 =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기회가 닿질 않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명성황후께 한 일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러 왔습니다." 
    1895년 벌어진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에 가담했던
    일본인 낭인 가운데
    한명인 구니토모 시케아키(國友重章)의 친손자
    가와노 다쯔미(河野龍巳ㆍ84) 씨가
    일행과 함께 9일 한국을 찾았다.

     
    사건이 일어난 지 110년 만에 명성황후의 무덤 앞에서
    할아버지를 대신해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다.
     
     
    이번 방문은 
    정수웅 감독(다큐서울 대표)

    이 다큐멘터리 '명성황후 시해사건, 그 후손들 110년 만의 사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으로, 방문단에는 시해 가담자였던
    이에이리 가가치(家入嘉吉)의 손자 며느리 이에이리
    게이코(家入惠子) 씨와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회원 등 약 10명이 포함됐다. 

     

    이날 서울 필동 한국의집에서 기자와 만난 가와노 씨는 '사과',
     '반성'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사용하면서 사죄의 뜻을 거듭 나타냈고,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다며 명성황후 시해 당시 모습을 전하기도 했다.
     
     
    또 자리에 함께한 최서면 명지대 석좌교수가 대담 도중
    "일본인들은 반성한다고 해놓고 진정한 반성이 아니었다.
    진정한 반성을 하라"고 말하자 그는 눈물을 흘리며
    "진정으로 반성한다"고
     말하면서 최 교수가 뜨겁게 악수하기도 했다.
     
    다음은 
    가와노 씨와 일문일답.



     
    -- 이번 방한의 목적은.
     
    ▲ 할아버지가 명성황후께 한 일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러 왔다.
    내일(10일) 오전 명성황후가 묻힌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을 참배하고 여주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도 방문할 것이다.
    홍릉에 가서는 '명성황후는 한국을 위해서 러시아 세력을 끌여들인 것인데 그 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생각하며
    내 할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할 생각이다.
     
     
    -- 사죄 방문이 좀 늦은 감이 있는데.
     
    ▲ 일찍 오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질 않았다. 혼자 오기에는 용기가 없었다.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회원들을 알게 돼  이렇게 올 기회가 생겼다.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은 일본 침략의 역사를 제대로 알자는 취지에서 모인  '평화헌법을 살리는 구마모토현민 모임'에서 출발한 것으로, 활동 도중 명성황후에 대해서도 알게됐다.
     
    -- 할아버지에게서 시해 사건에 관해 들은 바가 있는지.
     
    당시 자객들이 들이닥치자 깜짝 놀란 궁녀들이 명성황후를 감쌌다고 한다.
    자객들은 궁녀들 가운데 있는 사람이 명성황후임을 직감으로 알고 칼로 찔렀다고 들었다. 이건 할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은 것은 아닌데,
    자객들은 칼로 찌르기 직전 "당신이 명성황후 맞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또 직접적으로 칼로 찌른 사람은 데라자키라고 야마베라는 사람은 기록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가 시해 후 명성황후 허리춤에서 빼앗았다는
    비단으로 된 열쇠주머니를 갖고 놀기도 했다.
    자라면서 잃어버렸는데 최근에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 사진으로 찍어뒀다.
     
     
    -- 할아버지의 전력이 성장하면서 부담이 되지는 않았는지.
      
    ▲ 어렸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할아버지가
    애국심의 발로에서 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최근 한ㆍ일 간에 독도를 놓고 영토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데.
     
    독도 문제는 극히 사소한 문제다. 
    독도에 현재 한국 사람들이 들어가 있는데 
    어떻게 일본땅이 될 수 있는가. 
    더 중요한 문제는 명성황후에 관한 문제다.
     
     



     

    을미사변 당시 일본 시해범들이
     명성황후의 시신을
    경복궁 녹산 남쪽에서 불태우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과 전말 [에조보고서] 

    명성황후
     일본 낭인 20여명에게 당한 강간묘사 보고서 공개

     

    한국 정부 고문 이시즈카 에조

     

    일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낭인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를,

    1988년 《민비암살》(閔妃暗殺)을

    발간한 일본의 저명한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여사가

    자신의 저서에서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때 내부 고문은 정식 직책이 아니라 명목상의 직책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시즈카 에조는 낭인으로서 명성황후 시해에 참여하기 이전에는

    법제국 참사관을 지냈으며, 에조의 보고서는 현장 총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고

    이전 상관에게 보내진 셈이었다. 


    발견 과정

    〈에조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7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철저하게 숨겨져 있다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인데, 그는 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를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발간했다.

    여기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고,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일한병합소사》가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된 때는 1982년 6월이다. 신학자 안병무 선생이 《한일합병사》(범우사)로

     

    제목을 바꾸어 번역했는데, 문제의 ‘능욕설’ 대목이 존재한다. 이 능욕설 대목은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서술하였다는 근거로 여겨지지만,
    그의 책에서 보고서의 존재는 거론하지 않았다.[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책은 1966년 9월 발간한 《일본의 한국병합》

     

    (日本の 韓國倂合)이다. 친북조선 계열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야마베 겐타로의 언급 이후 ‘능욕설’은 재일 사학자 박종근, 나카쓰라 아키라 등이 거론한 바 있다.

     

    그러나 ‘능욕설’의 전적(典籍)이라 할 수 있는 〈에조 보고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저서에도 등장하지 않았다고

     

    김진명 씨는 주장한다.

    〈에조 보고서〉가 다시 언급된 때는 1988년이다. 앞서 거론했던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

     

    (김은숙 한국교원대 교수 번역, 조선일보사 출간)에 잠시 등장한다.

    보고서 전문의 발견 과정

    소설가 김진명이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을 읽다가 그 행간에서 명성황후의 죽음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음을 깨닫고,

     

    그 책을 번역한 김은숙 교수를 통해 후사코 여사로부터 대여섯 권의 전적을 소개받았으나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뒤 한국과 일본을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고, 후사코 여사마저 “기억이 희미하다”라며 물러섰다.

     

    막다른 골목에서 김진명은 평소 알고 지내던, 동경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외교사를 전공하는 권용석에게 보고서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고 귀국한다.

    김진명이 한국에서 지내던 어느 날 권용석이 그에게 책 몇 권과 자료를 보내었다. 그중에는 《일본의 한국병합》도 있었고,

     

    그 책을 읽다가 김진명은 ‘능욕’ 장면 중 일부를 발견하였지만, 에조 보고서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진명은 문득 짚이는 것이 있어 《일본의 한국병합》을 다시 꺼내들었다.

     

    문득‘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발견한 장소를 어딘가에 밝혀놓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에조 보고서〉를 언급한 그 책의 223쪽 주석에 출전이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장<헌정사편찬회문서(憲政史編纂會文書)”  라고 밝혀져 있었다고 한다.

    김진명은 일본의 권용석에게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가서 그 문서를 찾아 팩스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에조 보고서〉 전문은 장장 107년 만에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보고서의 내용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원인과 발단에서부터 실행자와 사후 대책까지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에조 보고서〉의 분량은

     

    각 2쪽씩을 차지하고 있는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이다. 아울러 보고서는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 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1]

    또한 “명성황후 능욕설” 및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에조란 한 일본인의 보고서로 을미사변 직후 바로 작성되어 스에마쓰 법제국장에게 전달된

     

    시해사건에 가담한 일본 관련자 처벌 수위를 낮추기 위해 쓴것이라 한다. 
    "스에마쓰 장관님,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 건청궁 옥호루에서 민비를 시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보고를 드리고자 합니다.민비는 강제로 저고리가 벗겨져 가슴이 훤히 드러난 
    상태로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낭인 하나가 거센 발길로 민비의 가슴을 밟고 짓이기자 또 하나의 낭인이 민비의 가슴을 칼로 베었습니다.

     

    일은 그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왕세자를 불러 죽은 여인이 민비임을 확인한 낭인들은 모두 민비의 주위에 몰려 들었습니다.그들은 조선의 가장 고귀한 여인을  앞에 두자 갑자기 숙연해졌습니다. 왕비를 시해했다는 기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조선 제일의 미녀를 앞에 두어서였는지... 
    낭인들은 민비의 하의를 벗겼습니다. 한 낭인이 발가벗겨진 왕비의 음부를...숫자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몇몇 낭인이 결국은  바지를 벗고 성기를 꺼내 왕비의 희고 깨끗한 몸에...정액으로 얼룩진 조선 왕비의 시체를 앞에 놓고 낭인들은
    대일본 만세를 불렀습니다."
     
    일본에서 "에조 보고서"라는, 
    편지 형식으로 된 정식 보고서가 있는데 에조라는 사람이 명성황후의 시해 장면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해놓았다. 

     

    먼저 낭인들이 20명 정도 궁에 쳐들어와서 고종을 무릎 꿇게 하고 이를 말리는 세자의 상투를 잡아 올려서 벽에다

     

    던져 버리고 발로 짓밟았다. 
    그리고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옆구리 두 곳과 배에 칼을 꽂은 후 시녀들의 가슴을 다 도려내고

     

    명성황후
    의 아랫도리를 벗겼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20명이 강간을 했다.
    살아 있을 때에도 하고 한 6명 째에서부터는 죽어 있었는데도 계속했다.
    강간을 시체에 하는 게 '시간'이고, 살아 있는 사람에 하는 게 '윤간'인데

    명성황후는 시간과 윤간을 다 당했다.

    그리고 그것을 뜯어말리는 충신의 사지를 다 잘라버렸다. 도대체 그 어떤 이가 한 나라의 황후를 그렇게 대하는가. 

     

    이 경우는 고대에도 근대에도
    절대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한 후 너덜너덜해진 명성황후의 시체에 얼굴부터 발끝까지 차례대로 한 명씩 칼로 쑤셨다.   물론 이미 명성황후는 죽은 후였다.
    그리고 여자로서 가슴을 도려내는 큰 수치를 당했다. 
    그것도 길거리 서민들이 다 보고 있는 데서 시행했다.

    그 다음에 명성황후 시체에 기름을 붓고 불로 활활 태웠다.

    일본 사학자가 이 문서를 발견하고 수치스러워서 공개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2002년 FIFA 한일월드컵 폴란드전 때 공개를 했는데 당시
     조중동 어느 신문사에서도 기사를 싣지 않았다.
    사건에 가담한 범인 중 상당수가 지식인들이었고 그중에 여섯 명은 유학파였다.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 진상을 안 러시아 공사관이 곧바로 일본 정부에 알리고 일본 낭인들을 불러들였다.

     
     이런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천인공노(天人共怒)한 짓을 저질은 놈들
    이러고도  왜놈의 쌔끼들,
    너희들이 감히 평화를 논하느냐?
    그러기에 원자탄도 얻어맞고,
    시시때때로 하늘이 너희들에게 가지각색의 벌을 주고 있는 걸 모른 단 말이냐,
    이 쪽빨이 쌔끼들아, 석고대죄를 그만두라고 할때까지 하지 않는 한 하늘의 천벌은 계속이어질 지어다. 
    절대다수의 일본국민들은 110년만에 사죄방문을 온 사람들 처럼 선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걸 잘알지만 
    아베
    같은 새끼가 지도자로 있기 때문에 
    애꾸즌 사람들이 손구락질을 받고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구나.





    [오늘의 뉴스인] 을미사변 120주기,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YTN  

        

     

    國母 明成皇后(국모 명성황후)의




                                           명성황후 찌른 칼,

    명성황후 찌른 칼,
    현재 일본 신사에 보관되어 있다 **
    1895년 양(陽) 10월 8일. 새벽 5시경 경복궁 광화문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 ‘여우사냥’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자행된

    명성황후 암살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왕비의 거처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
    명성황후의 암살에 성공하고 유해(遺骸)를 불태웠다.

    110년전의 그날, 명성황후의 목숨을끊은 자객의 칼은

    일본 신사의 귀중품으로 기증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 일본인 자객 토오가쯔아키(藤勝顯), 신사에 칼 기증 ]

    [ 쿠시다 신사 정문 ]

    [ 쿠시다 신사 내부. 신전(神殿)의 모습 ]
    쿠시다 신사는 후쿠오카 시내에 위치해 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이곳에 보관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은 MBC 시사매거진

    2580 취재팀과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간사 혜문스님 등 일행에 대해,

    신사 관계자는 대단히 난처해 했다
    "이 칼을 공개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쿠시다 신사의 책임자 아베 켄노스케(阿部憲之介) 궁사

    상기된 얼굴로 일행을 맞았다.자주색 보자기에 싼 칼을

    취재진에게 풀러 놓았을 때. 가슴 한쪽에서 피가 울컥 쏠리는느낌이었다.

    전체 길이 120㎝. 칼날 90㎝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라고 적혀 있었다.

    칼주인이 시해 당일 작전명

    여우사냥’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새긴 것이라고 한다.

    궁사는
    잠시동안의 정적을 깨며 이 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짤막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칼은 히젠도라고 불립니다.

    16세기 에도시대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명검입니다.

    제작당시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살상용, 다시 말해 사람을 베기위한 의도로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는 명치 41년(1908) 토오 가쯔아키란 분이

    신사에 기증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 칼을 빼고 있는 궁사의 모습 ]

    칼집에 새겨 놓은 글씨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찌르다.

    ’쿠시다 신사측 명성황후를 이 칼로 베었다고 기록

    기증관련 서류. 좌측상단에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란
    기록, 하단에는 기증자의이름도 보인다
    그러나 기증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문서에는 모든 것이 다 적혀 있었다.

    토오가 이 칼을기증할 당시 궁사가 중요한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는

    서류에는 “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 대목을 우리가 소리내어 읽자 궁사는 별다른 반응 없이

    정치적 파장을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토오가 정말 명성황후를 절명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왕비의 침실에 난입한 사람중 하나란 것은 맞습니다. 사건 당시
    왕비는 궁녀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그가살해한 사람이

    궁녀일 수도 있고 궁사는 그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긴 설명을 늘어 놓을 수록 난처해질 거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그런 심경을 반영하듯 그의 얼굴은 대취한

    술꾼 처럼 붉게 달아 올랐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긴장시켰다.
    이곳은 신사입니다.

    이 지방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곳이지요.

    히젠도는 16세기부터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거둔 칼이고 또한 유명한 칼이니까

    이곳에 기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궁사는 말을 마치고서 이내 칼을 거두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안부외의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히젠도: 한 눈에 명검임을 알 수 있다.

    사진속의 칼에 방안의 병풍이 반사되고 있다
    * 토오가쯔아키(藤勝顯)는 누구인가? *
    토오 가쯔아끼(藤勝顯)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사람 중에 하나이다. 일본의 저명한 문필가 쯔노다 후사꼬의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에는 사건당시 살해 용의자들의 수기와

    증언들을 적어 놓았다. 그중에 실린 데라사키의 편지에는

    "나카무라 다테오, 토오 가쯔아끼, 나(데라사키) 세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

    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장에 의하면 “나카무라 다테오가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 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달려온 토오 가쯔아끼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고

    기재되었다.
    정리하자면 토오 가쯔아끼는 왕비의 침실로 최조 난입한

    3사람 중 하나였고, 명성황후를향해 이 칼을

    휘둘러 절명시켰던 가장 유력한 사람인 것이다.

    뒷날 토오 가쯔아끼는 그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칼을 신사에

    맡기며 당부했다고 한다
    [ 다시는 이 칼이 세상에 나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칼끝 . 매우 예리하게 연마 되어 있다.








    출처 : 한국전통예절 연구원
    글쓴이 : 선 광 ( 善 光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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