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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이중섭과 황소
    Artist(Painter,Muscian...) 2014. 2. 11. 23:27

     

     

     

    이 중섭과 황소

     

     

    이중섭의 생애


    대향(大鄕, 혹은 소탑(素塔))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지주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중섭의 미술에 대한 재능은 어렸을 때부터 그 조짐을 보였다. 게다가 외탁으로 자랐던 그는 공립보통학교를 서울 종로에서 다니게 되어 혼자 사색할 시간이 많았다. 내성적인 성격의 이중섭은 학과 공부보다 그림에 더 매달렸고, 그로 인해 원래 진학을 목표로 하였던 평양고등보통학교에 낙방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평양고등보통학교 대신 오산학교에 입학했던 이중섭은 미술담당 교사였던 임용련을 만나게 된다. 미국 예일대에서 미술공부를 했고, 파리에서 활동했던 임용련은 당시 대부분 작가의 유학지가 일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드문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습작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했다고 한다. 이중섭은 이에 영향을 받아 습작을 많이 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가 다수의 드로잉을 남겼던 이유가 이 때문이다. 또한 이중섭의 유년기였던 1920년대 우리 미 계에는 유화 작가(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나혜석)이 속속 등장해 근대화의 시동을 걸었던 시기다.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임용련 선생과의 만남, 그리고 근대 화단의 형성 과정을 직접 몸으로 겪었던 이중섭은 자신의 경험이 이후의 작품활동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임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중섭의 본격적인 미술공부는 1935년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武藏野美術大學)) 서양화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제국미술학교는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와 더불어 일제 치하 많은 한국인 유학생을 배출했다. 그러나 곧 이중섭은 제국미술학교를 그만두고 분카가쿠엔(文化學院) 미술과로 옮기게 된다. 이는 제국미술학교보다 분카가쿠엔이 당시 일본 미술계에 유입되던 전위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혀있었기 때문이다. 분카가쿠엔에서의 이중섭은 강렬한 야수파의 조형성을 선보였다. 그래서 이 시기는 자유롭고 강렬한 선묘력으로 대표되는 이중섭의 조형세계가 열렸던 때이다. 더불어 이중섭은 이곳에서 훗날 부인이 될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李南德)를 만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4년 이중섭은 학교를 졸업하고 연인 마사코를 일본에 둔 채 원산으로 돌아왔다. 이듬해에 마사코가 한국으로 왔으며, 둘은 혼례를 올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1946년 첫 아이가 태어났지만 곧 디프테리아로 잃고 말았다. 당시 제대로 된 직업없이 작품제작과 전람회 출품에 몰두하던 이중섭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를 계기로 죽은 첫 아이를 모티프로 한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1947년 <해방기념전람회>에 출품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중섭은 한국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정착하지 못하고 전국을 전전하는 생활로 빠져들게 된다. 첫째 태현(1947)과 둘째 태성(1949)이 태어났고, 피난을 위해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전세의 위급함을 느끼고 다시 제주로 피난하게 된다. 1952년 생활고에 못이기던 마사코는 결국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가게 된다. 그 후 이중섭은 1953년 도쿄에서 단 5일의 해후를 끝으로 가족과 영영 이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생이별의 아픔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중섭 필생의 걸작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지인의 도움으로 1954년까지 통영에 머물렀던 그는 [소] 연작과 [부부] 등 한국미술의 대표작을 쏟아냈다. 이후 진주, 서울, 대구 등지를 전전하면서 전람회 출품작에 몰두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술로 달래던 이중섭은  1956년 9월 6일 간장염으로 서울 적십자 병원에서 타계했다.

    이중섭의 작품 세계


    총 300여 점으로 알려진 이중섭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는 어린이, 소, 가족, 물고기, 게, 달과 새, 연꽃, 천도복숭아 등 우리의 전통적인 소재들이다. 특히 그는 위에서 언급한 소재 외에 소재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반복적으로 그렸으며, 때로는 복합적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이러한 소재들은 다양한 기법과 매체로 표현되었다. 이중섭이 이러한 소재를 즐겨 사용한 이유는 오산학교 시절 받았던 교육의 영향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민족사학이었던 오산학교 출신의 이중섭은 교육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향토적인 소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중섭을 대표하는 작품의 소재는 ‘소’일 것이다. 그가 통영에서 보낸 시절 선보였던 [소] 연작은 이중섭 작업의 백미로 꼽힌다. 채 10호(인물기준, 45(세로)×53cm)가 되지 않는 비교적 작은 사이즈의 이 연작들은 형태의 표현이 강렬한 선으로 이뤄졌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작가의 격렬함과 집념, 우직함과 자연스러움, 야만성, 고뇌와 연민, 환상과 방랑성, 갈망, 광기 그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김인환, <공간>, 1978년 9월호) 이 말이 이중섭 [소]의 특징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이중섭은 소의 표현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폭발적으로 보여주었다. 앞발에 힘을 모으고 언제든지 튀어나갈 듯한 역동적인 소의 표현은 그의 선묘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는 유년시절부터 이어온 그의 관찰력에 바탕한다. 오산학교 시절, 들판의 소를 유심히 관찰하다 소 도둑으로 몰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다음은 김환기의 말이다. “작품 거의 전부가 소(牛)를 취재했는데, 침착한 색채의 계조, 정확한 데포름(deformation), 솔직한 이마주(image), 소박한 환희-좋은 소양을 가진 작가다. 쫓아오는 소, 외치는 소, 세기의 음향(音響)을 듣는 것 같다. 응시하는 소의 눈동자 아름다운 애련이었다.”(김환기, <문장>(1940.12)) 통영에서 보냈던 시절보다 10년 먼저 이중섭의 소의 표현은 이러한 평가를 이끌어 냈다.

    그런데 담배 내부 포장지였던 은지(銀紙)에 그렸던 작품은 종이를 살 수 없던 이중섭의 경제적 궁핍을 나타낸다고 알려져 많은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물론 이중섭은 유복한 유년시절 이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생활고 때문에 가족과 생이별을 했을 만큼 궁핍하게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매체, 즉 은지를 비롯 합판, 종이, 심지어 책의 속지에도 그림을 그렸다는 점, 그리고 유화물감을 비롯해 연필, 크레파스, 철필, 못, 송곳 심지어 손톱까지 다양한 표현 수단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이중섭이 실험적인 작업을 추구하기 위해 은지와 같은 다양한 매체를 사용했다는 주장도 힘을 얻는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두북 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 소의 말, 이중섭-

    이 중섭이 남긴 유일한 시이다.

    타계 이후


    이중섭 전시는 타계 이듬해 <유작전>을 시작으로 1970년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특히 1972년 현대화랑의 15주기 기념전은 [이중섭 작품집] 도판이 출간되어 이중섭을 대중에게 알리는데 큰 기여를 한 전시로 꼽힌다. 또한 1979년 미도파 백화점(현 명동 롯데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전시에는 이중섭이 부인 마사코에게 구애의 마음과 가장으로서 그리운 마음을 담은 엽서화와 은지화 등 200여 점의 작품이 공개되었다. 이중섭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1986년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30주기 회고전에서 10여만 명의 관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진품

     


    위작품

    껄끄러운 일이나 이중섭과 관련한 위작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작가 중 이중섭만큼 위작 논란에 자주 휘말린 작가도 없다. 왜 그럴까? 이중섭은 한정된 소재를 반복적으로 사용했고, 강렬하고 최소한의 선의 표현으로 형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중섭의 작품이 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에 터진 이중섭 위작 사건은 가족이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중섭은 그의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도 내용은 다르지만 똑같은 그림을 각각 보낼 정도로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는데 말이다. 또한 이중섭의 드로잉 3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었다던 고서적 전문 수집가의 소장품 전부도 법원에 의해 가짜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오해는 바로 작가에 대한 자료가 일천한 까닭이다. 광복과 전란,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겪으면서 미처 이런 부분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이중섭이 좀 더 화단에서 활동했더라면 이런 유감스런 일은 없었을까? 역사는 가정(假定)을 부정한다

    여기에 이중섭의 소와 관련된 작품을 모아 보았다.

    이중섭은 한글 싸인으로 일관한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어떤그림에는 'ㄷㅜㅇㅅㅓㅂ'
    또는 'ㅈㅜㅇㅅㅓㅂ'으로 사용했는데 전자는 후자의 평안도식 발음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패티 김 김도향 - 향수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설봉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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