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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담의 창조 전에도 사람이 있었는가?
    IMMANUEL 2011. 5. 5. 13:01

     

     아담의 창조 전에도 사람이 있었는가?

      

     아담의 창조 전에도 사람이 있었는가?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문제중에 하나이다. 살인자 가인이 추방당할 때 다른 사람들이 죽일까 두려워하는 대목과  또 이런 저런 근거를 대면서 '성경을 보니 아담 전에도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었다'고 말한다. 또 그런 사람들은 '아담 이전에도 사람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것을 확신에 차서 말하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런식의 글들이 외국의 책이나 목회자들의 무분별한 설교를 통해서, 또 신학교에서 교수들이 제대로 알지못하고 가르쳐서 이단사이비가 나오게 하고, 또  하나님을 부정하게 하는 지식으로 발전 하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이 문제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이단 사상을 가르쳐온  베뢰아 신학이 있다. 귀신론을 잘못 이해 하는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지만 바르게 가르쳐 주어도 도무지 자기들 주장만하지 올바른 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늘은 일맥이 이와같은 문제를 모회원의 요청에 의하여 정립하고자 한다. 성경은 장수(章數)가 길든지 짧든지 항상 시작은 구원론으로 시작하고 그것에 결론이 주어지면, 다시 중간이나 끝 부분에서 성도로써 지켜야 할 생활적인 내용이 포함이 되고, 그 대목이 결론 되어지면, 다시 격려와 천국의 소망을 갖는 믿음 갖기를 소망하면서 끝을 내게된다. 예를들면 로마서는 1장부터 11장까지 복음과 율법이 무엇이냐? 어떻게 구원받느냐?를 이야기하고, 12장에 가서는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식으로 결론을 맺게된다. 이렇게 성경을 우선 큰 대목으로 나누어서 보면 이해하기가 무척 쉽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부탁을 드리자면 성경은 통(通)(whole)으로 보아야 오류가 나지않으며 무슨 뜻인지 자세히 알게 된다.

     

    창세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아래도표 참조하라

     세상의 창조 시작 (서막)  구원의 시작
     인간의 시작(후손의 시작)  택함을 시작
     죄의 시작 (죽음의 시작)  계약(약속)의 시작
     제사의 시작 (용서의 시작)  믿음의 시작
     인간의 공동체 시작  민족의 시작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  동맹체가 시작
     각나라 언어의 시작  구원의 계통이 시작

     

     그러면 성경이 언제부터 글자로 기록이 되었을까?

    이 문제만 해결하면 해답은 나오게 되어 있다. 사실 나도 예수님을  믿고 처음에는 성경을 보면서 의문점을 기록하여서 담임목사님과 성경을 조금아는 듯한 사람들을 많이 힘들게하고 괴롭혔다. 그 이유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정도 성경의 맥을 알고 나니 결코 목사님을 우습게 보거나 내 자신이 나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때는 설교를 듣다보면 "저 분은 다시 배워서 가르치는 것이 본인이나 교인들에게 좋겠다"  싶은 안타까운 분들이 가끔은 눈에 띈다. 성경을 자기 편한대로 쪽집게로 뽑아서 엉뚱한 해석을 하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오직 통(通)(whole)으로 보아야 의미를 알 수 있다.

     

    구약성경은 기록된 문자보다도 훨씬 오래된 히브리인의 “기억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구약 본문들의 배후에는 상당한 기간 동안의 구전(口傳)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문들 속에는 그 이야기를 전해 준 당대의 대화자들의 구전양식을 보존하고 있다. 고대 근동 문학의 시초는 노래였으며 그 방법은 구전이었다. 입(言)으로 전해서 다음 세대에 입(言)으로 전해주는 방식이다. 셈 족속들이 유목민으로 돌아다니던 시절, 천막을 치고 모닥불에 둘러 앉아서, 예부터 그들 사회에 전하여 오던 영웅에 대한 신기하고 감동적인 노래와 이야기를 대대로 되풀이 하였으며, 후세에 구전으로 전하게 되고 마침내 글로 남기게 되었다.

     

    그 기록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노래를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부르게 하라고 명하시는 대목에 있다. 신명기31장19절에『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은 아기가 태어나면 듣든지 안 듣든지 성경 이야기를 반복한다고 한다. 성령님께서는 성경을 만드시기 위해서 모으시고 편집하시고 역사를 이루어 가시며 그것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산자와 산자를 통하여 메세지를 이어가셨다.

     

     그러면 언제 문자로 기록되었나?

     히브리 성경를 포함하여 고대 근동 문학은 그것을 읽는 공중(the reading public)보다는 그것을 듣는 청중(audience)을 위해 쓰여진 작품들이다. 근동 세계의 동부와 서부를 막론하고 서사시(epie poetry)는 원래부터 읽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듣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고대 근동의 모든 서사시는 음악을 동반한 노래로 불리워지거나 또는 낭송하게 되어 있어서, 독경보다는 듣는데, 필기보다는 암기에 큰 중점을 두었다. 따라서 고대근동 문학의 필자와 독자들의 관심은 온통 저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썼느냐도 아니고, 독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도 아니고, 다만 그 작품에서 지각(이해) 되어지는 의미들이 무엇이냐 하는것과 더불어 어떻게 그것을 낭송하고 암기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당시에는 설형문자 본문들에 대한 문맹자들이 너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읽는 것 보다는 듣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따라서 듣는 청중을 의식해서 그들을 중심으로 한 낭송과 암기에 강조를 둔 것이 고대 근동문학의 양식과 구조를 결정하였다. 설화에서 창조의 과정을 강조하기 위해 고안된 기교에 의한 것이다. 작품속에서 화자(speaker)는 상황에 따라 산문도 시문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반복의 현상은 전형적인 근동 문학의 기교로 인정된다. 그리고 문장구조에 대한 청중이론은 히브리 성경의 자료비평(source criticism)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반박이 될 수 있다. 지금도 중동지역을 여행하다보면 광장에서 이슬람 문학을 읽어주거나 이야기하여 주고 돈을 받는 사람들이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은 우리나라의 방식으로 읽어가면 저자가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 어려울 때가 많다는게 사실이다. 특히 고대 근동 세계에서 제사장의 결정과 예언자의 신탁은 모두 말씀이었다. 따라서 히브리 성경와 고대 근동 문학의 비교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옛 설화들이 인위적으로 짜여진 상당히 세련된 작품으로 보이는 것은 그것들이 그 당시의 수사적 문장가들 즉 서기관들이나 후기의 편집자들에 의해서 그러한 형태로 꾸며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설화를 전해주던 당시의 대화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이러한 결과는 우주관, 신화와 전설, 설화와 사화, 족보와 전통, 관습과 도덕 및 율법과 시가, 제사의 예식과 기도문 등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구비 전승이 문자에로 옮겨간 근본적이고 의식적인 변천은 중대한 외적 및 내적 상황들이 살아있는 전승을 파멸시키려고 위협할 때 일어났다. 기록된 서전이 구전보다 더 낫고 또한 그것이 변화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은 경전화 작업의 결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바벨론 이주 이전에는 대부분이 구전이었으며 후기 유대인 공동체에 와서 모세오경이 기록되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이 팔레스틴에 진입할 때 벌써 그곳에는 우가릿 문헌을 비롯한 기록된 문학들이 번창했으므로 역대지략이나 주석책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성경만이 당대에는 기록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구약성경의 상당한 책들은 처음부터 문헌들이 단번에 기록되어 전수 되었으며 바로 그때부터 현재의 모습대로 전승되었던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팔레스티에 정착했을 때 이미 그곳에서는 바벨론의 설형문자(cuneiform character)가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공문서와 외교문서에는 이것을 사용하였고, 이집트 세력이 팔레스틴을 석권 하였을 때에도 그들의 상형문자(hieroglyphics)가 설형문자를 대치할 수는 없었다. 팔레스틴의 서기관(書記官 학교(scribal school)에서 이 글을 가르쳤었다. 이들 서기관 학교에선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문학 작품들을 대량으로 가져다가 교재로 활용하였으며 그 중요 내용들은 주로 찬미가와 서사시, 신화와 전설, 지혜교훈 등이었다. 

    예수가좋다오

    그러면 창세기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창세기는 앞에서 말한 것같이 구전에 의하여 전해온 것을 현재 우리가 보는 활자화 하였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히브리 민족의 문학(文學)은, 책꽂이에 책을 꽂아 놓고 먼저 펼쳐서 보여주고 하나,하나 설명해 나가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1장과 2장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왜 인간을 만드셨나? 하는 것을, 만드시는 과정을 먼저 설명을하고 3장부터 그것을 분해 내지는 개관을 하는 방법으로 설명을 하였다. 창세기 3장은 1장과 2장의 설명서이며 해설을 해나가는 분해서(分解)이다. 2장에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그 사람이 3장의 아담이고 아담을 왜 만드셨고, 하나님과 관계가 이런 것이다라고 해석해 나가는 것이다. 지금부터 창세기를 펴놓고 1장-2장을 보고 다시 3장을 보기를 바란다.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성경이 이런 방식을 채택하여 기록되었고 메세지와 결론으로 나간다.

     

    그러므로 성경의 시간은 인간들이 활자로 보는 것같이 한자 한자로 해석을 하면 전혀 엉뚱한 방식으로 해석이 된다. 아담이 육체가 된후에 몇 만년인지 몇 천년인지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 그리고 후대(後代)에 전한 구전가(口傳歌)가 전해주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구원에 관하여 필요하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만 전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시간이나 그밖에 잡다한 것을 생략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기억하고 후대에 전해주기 위한 다이어트적인(압축) 내용일 것이다. 그것으로 보아서 아담 전에 사람이 살았느니 안살았느니 한다면, 문자만 보고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어리석은 자이다. 창세기는 창조와 구원을 하시겠다는 메세지를 전해주는 책이다.

     

    성경은 다른책에 있는 문헌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열왕기상15장7절『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아비얌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역대하13장 22절『아비야의 남은 사적과 그 행위와 그 말은 선지자 잇도의 주석책에 기록되니라』이런식으로 다른 책의 글들을 인용하기도하고 우리가 모르는 여러가지 역사적 책에서도 인용하기도 하였다.

     

    구전에 관하여 아래의 예화를 하나 소개하면서 결론을 하려고 한다.

    TV에서 본 [뿌리]는 흑인 노예의 참상을 다룬 드라마라는 것과 너무도 선명하게 ‘쿤타킨테’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데 그 [뿌리]를 최근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뿌리]의 지은이인 알렉스 헤일리는 실지 외가 쪽으로 쿤타킨테의 7대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를 통해 먼 조상인 쿤타킨테 할아버지의 사연을 어제 일처럼 듣고 자랐다. 지은이는 "역사란 승자들 쪽으로 심하게 치우친 시각에서 쓰였다는 과거의 유산을 보완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하였다. 이 책은 한 흑인 노예와 그 후손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루지만,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끌려간 수 많은 노예들의 비참상을 유추해 볼 수 있기에 한 가계의 이야기를 뛰어넘는다.

    쿤타킨테는 ‘1750년 이른 봄, 서아프리카 감비아 해안에서 나흘정도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타나는 주푸레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모로와 어머니 빈타 킨테의 첫 아들로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씩씩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엄격하고 혹독한 성인식을 무사히 치른 다음에는 이제 자신 또한 자신의 아버지처럼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고 하면서 살아갈 꿈을 꾸며 동생들에게도 너그러운 형이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열일곱, 동생의 장난감 북을 만들어주고자 괜찮은 나무를 찾아 숲을 헤매다가 노예 사냥꾼에게 잡히고 말았다.

    발가벗은 채로, 쇠사슬에 묶이고, 발이 채워져서, 그는 찌는 듯한 더위와 구역질나는 악취, 그리고 비명을 지르고, 흐느껴 울고, 기도를 드리고, 구토를 하는 악몽 같은 광란으로 가득 찼으며, 칠 흙 같은 어둠 속에서, 다른 두 남자 사이에서 누운 채로 정신이 들었다. 그는 가슴과 배에서 자신의 토사물 냄새를 맡고는 손으로 만져 보았다. 그는 붙잡히고 난 다음 나흘 동안 매를 맞아서, 온몸이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가장 아픈 곳은 양쪽 어깨 사이의 한가운데 인두로 지진 자리였다.

    7대 후손인 알렉스 헤일리가 찾은 문서에 의하면 그는 1767년 ‘로드 리고니어호’를 타고 아나폴리스 항구에 도착한 140명 노예중 42명이 죽고 살아남은 98명중의 한사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그는 ‘최고급 젊은 검둥개’로서 존 월러라는 사람에게 팔렸다. 그러나 그는 노예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생면부지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탈출을 감행하였다. 탈출이 실패로 돌아가 붙잡히면 죽도록 얻어맞아야 했지만 그는 두 번, 세 번 탈출을 멈추지 않았다. 뛰어 봤자 노예 사냥꾼들의 손바닥 안이고 더 이상 어찌 해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네 번째 탈출의 실패로 오른발이 잘리고 난 후였다.

    네 번째 탈출에서 붙잡혔을 때 그는 노예 사냥꾼을 향해 돌멩이를 던져 상해를 입혔는데 이해 격분한 노예 사냥꾼은 발을 자를까, 성기를 자를까하며 쿤타를 위협하였다. 쿤타는 진정한 남자는 아들을 두어야 한다는 내면의 울림에 자신의 성기를 가렸고 노예 사냥꾼은 쿤타의 발을 겨냥했다.

    쿤타가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을 치는 사이에, 도끼는 번쩍 올라갔다가, 순식간에 내려쳐서, (살갗과, 근육과, 뼈가 절단되었고) 쿤타는 도끼가 쿵 나무토막에 찍히는 소리를 실제로 듣고는, 충격과 고통이 머릿속 깊숙이 되울렸다. 폭발하는 듯한 고통이 온몸에 충격을 주자, 쿤타의 상반신은 발작적으로 고꾸라졌고, 시뻘건 피가 잘린 발의 토막에서 뿜어져 나오자, 그는 떨어져 나간 발의 앞쪽 반 토막을 찾으려는 듯 두 손으로 정신없이 더듬거렸으며, 그리고 그의 주위는 온통 암흑이었다.


    발이 잘린 후로는 일꾼으로도 별 쓸모가 없는 존재였고 쿤타 자신 또한 탈출의 의욕을 상실했는데 다행이랄까. 존 월러 주인의 형인 의사 윌리엄 월러가 쿤타의 발을 자른 것에 격분하며 동생으로부터 쿤타를 샀다. 쿤타는 발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새 주인이 된 의사 윌리엄 월러의 간호를 받았고 다 나은 다음에는 얼마간 정원사로 소일하다 윌리엄 주인의 마차를 끌게 되었다. 그리고 씨가 마르기 전에 어서 자손을 보라던 어느 늙은 노예의 말을 상기하며 윌리엄 주인의 오랜 요리사이자 자신의 발 상처를 정성껏 보살펴줬던 벨과 결혼하여 딸 키지를 낳았다.

    그는 어린 딸 키지가 말을 배울 무렵부터 자신의 고향인 서아프리카 감비아 땅의 작은 마을 주푸레의 언어를 기억시켜주려 애썼다. 기타를 보고는 ‘코’, 강을 보고는 ‘캄비 볼롱고’로 가르치는 등 어린 딸에게 수없이 자신의 고향과 고향 말을 얘기했다. 열여섯 나이에 어이없이 부모를 떠나 다른 주인에게 팔려간 키지는 그의 아들 치킨조지에게 아버지 쿤타의 고향 아프리카를 뇌리에 심어주었다. 치킨조지 또한 그의 자식들이 태어날 때마다 쿤타 할아버지의 얘기를 되풀이 했고 그것은 몇 세대를 거처 알렉스 헤일리에게 까지 생생하게 전해졌다.

     문자가 없던 시절, 쿤타의 고향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말로 기억하는 구전역사가인 ‘그리오’를 두었었는데 그 그리오들은 수 백 년 역사를 한점 어긋남 없이 기억하는 존재들이었다. 때문에 한사람 그리오의 죽음은 오늘날로 치자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이런식이다. 일년에 큰비가 일년에 한번씩 오는 아프리카는 날짜보다 큰 비가 몇번 온 뒤에 누구를 낳고 누가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알렉스 헤일리는 마치 그 사실을 증명 해 받듯 자신의 6대조 외할아버지인 쿤타킨테와 그의 부모 형제 얘기를 그로부터 200년이나 지난 시대를 살고 있는 현재의 그리오에게서 정확하게 들었다.문학이나 개인의 역사도 이렇게 정확한데,성령님께서는 성경을 만드시기 위해서 모으시고 편집하시고 역사를 이루어 가시며 그것을 완성하셨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문자로 된 성경을 먼 시간과 환경을 지나서 지금 손에 잡았다. 우연일 수 가 없다. 그러나 그 성경이 전해주는 메세지는 뒤로하고 쓸데없는 것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한번 집어보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누가복음 3장37절-38절에『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아담의 윗대는 하나님이시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위는 없다고 기록되었다. 성경은 오직 구원에 관하여 기록한 책이다. 과학으로 보는 책이 아니고 믿음으로 보는 책이다. 

     

     아담 이전에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마귀가 우리를 속이려는 술책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창조론을 부인하고 진화론을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원숭이 자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자손임에 틀림없기에 오직 성경을 믿는다. 우리는 원숭이의 자손이 아니라 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지으신 최초의 인간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5장에도 아담의 계보가 있다. 이것에 분별력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고 승리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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