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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치 許鍊-운림산방
    CALLIGRAPHY,ORIENTAL 2010. 9. 1. 17:26

     

     

     

     

     

    1839년, 전남 진도에서 상경한 만 31세의 무명 화가가 지금 서울 통의동에 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저택 대문을 두드렸다. 청년의 이름은 소치(小癡) 허련(許鍊·1808~ 1893). 체계적인 미술 교육도 받은 적 없고, 고향 바깥 넓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와 필력을 알린 적도 없는 시골뜨기였다. 추사가 실력 하나 보고 소치를 문하에 거두면서, 붓 하나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천재 소치의 경력이 시작됐다.

    소치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과 더불어 19세기 후반 조선 회화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소치가 세운 화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이어간 허씨 집안 여섯 후손  허형(許瀅)·허백련(許百鍊)·허건(許楗)·허림(許林)·허문(許文)·허진(許鎭) 등이다.

     

    이동국 서울서예박물관 학예사는 "소치는 추사가 가장 사랑한 제자이자, 문인화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화가"라고 했다. 추사는 "난을 치는 법은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은 다음에야 될 수 있다"고 했다. 추사는 정치적 부침을 함께 한 엘리트 제자들을 제치고 시골에서 올라온 소치에게 사랑을 쏟았다. 소치 면전에서는 "자네는 천리 길에 "겨우 세 걸음만 옮겨 놓은 것과 같네" 하고 엄격한 얼굴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압록강 동쪽엔 소치만한 화가가 없다"고 극찬했다.

    소치는 추사의 후의에 온몸으로 답했다. 추사가 제주도에 귀양갈 때 따라가서 집중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추사의 귀양살이가 끝난 뒤에는 추사의 날개 밑에 깃들어궁에 출입하며 헌종(재위 1834~1849)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헌종도 죽고, 추사도 죽고, 소치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했던 장남마저 요절했다. 외로운 늙은이가 된 소치는 일흔이 넘도록 전국을 떠돌며 부유한 중인들의 주문을 받아 부귀의 상징인 모란을 숱하게 그렸다. 별명이 '허모란(許牡丹)'이었다고 한다. '미술은 어디까지나 여기(餘技)이며 그림을 팔아 돈을 벌지 않는다'는 문인화가들의 불문율을 뒤로 한 셈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소치의 작품 〈산수〉, 〈일속산방도〉, 〈모란〉이 그의 복잡한 정체성을 보여준다. 〈산수〉는 선비들의 관념적인 이상향을 그린 전형적인 문인화이고, 〈일속산방도〉는 다산 정약용의 제자가 살던 집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린 실경(實景) 산수화이며, 〈모란〉은 더 설명할 필요 없이, 붓 자국마다 감칠맛이 도는 꽃 그림이다.

    현대의 미술사가들은 "말년으로 갈수록 태작이 많다"고 소치를 마땅찮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래도 관람객 눈앞에 활짝 피어 오른 모란은 탐스럽기 그지없다.

     

     

     

     

     

     

     

     

     

     

     

     

     

     

     운림산방은 첨찰산을 깃봉으로 수 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연무가 운림(雲林)을 이루었을 것이고, '연화부'를 지었던 소치의 사상으로도 운림(雲林)이라는 당호(堂呼)가 걸 맞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소치(小痴)는 미산(米山) 허형을 낳았고 미산이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의제 허백련이 미산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익힌 곳이기도 하다. 이와같이 유서깊은 운림산방은 소치(小痴) - 미산(米山) - 남농(南農) - 임전(林田) 등 4대에 걸쳐 전통 남화를 이어준 한국 남화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전통남화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운림산방은 조선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유가 말년에 거처하던 화실의 당호로 일명 '운림각'이라고 한다. 소치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호를 붙여준 것이며 젊었을때는 련(鍊)이라 했고 자는 마힐(痲詰)이다. 32세때 초의 장의순의 소개로 서울의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서화 수업을 하였으며, 41세(1848)와 42세때는 낙선재의 헌종 앞에 나가 임금의 벼루에 있는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고 고서화를 평하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을 비롯하여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첨찰산 아래 쌍계사 남쪽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소치의 몽연록에 「복축운림 천지척원 시화양죽 낙의융 융」이라 하였고 「모시임종시유언차」에는 「가장병진년구성 습위삼십년 환사면림목지성 개오수종식 겸지화훼제품구어원야」라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이러한 모든 훼화나 나무는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며 황폐해 있던 연못은 복원되었다. 연못은 별당앞에 있으며 한 변이 35m가량 되는 사각형 연못의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 섬이 있고 여기에는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있다. 소치가 서화에 뛰어나 민영익은 '묵신(墨神)'이라 했으며 정문조는 여기에 시를 더하여 삼절(三節)이라 하였고, 김정희는 중국 원나라 4대화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을 '대치(大痴)'라 했는데 그와 견줄만 하다고 소치(小痴)라 했다고 한다.


    운림산방, 쌍계사, 상록수림이 한데 어우러진 이곳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운림산방에서 약 150m를 오르면 1995년 8월 15일에 세워진 진도아리랑비가 아담하게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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