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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韩国 敎 会의 大 復 兴/ 새벽 祈祷
    PRAYER 2010. 7. 26. 11:44

    韩国 敎 会의 大 復 兴/ 새벽 祈祷




    - 한국 교회와 1907 년 대 부흥 -

    1. 대 부흥 (復 兴)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들은 일찍이 1905 년 6 월 25 일 서울에서 한위원회를 조직하고 , 남장로교 레이놀즈 ( WD의 Reynoldes ) 의 동의를 만장일치로 가결한 바 있었다 . 그 동의에 의하면 "는 때가 성숙 하였으니 를 하나의 한국 민족 교회를 창설하여 그 이름을 [ 한국 기독교회 ] 라 하리라 " 이제 것이었다 은 한다는 .

    이를 시작으로 한국의 자립 · 자주적인 민족 교회의 형성 , 그것도 교파의 구별이없는 단일한 기독교회의 형성에 대한 범주적인 요청은 이렇게해서 널리 깔리기 시작했다 . 이제 여기에 한 획기적인 모멘트가 그 형성 력에 부여 되기만하면된다고 보았다 , 그것이 바로 1907 년도의 한국 교회의 대 부흥이었다 .

    2. 그 부흥의 원류 (源流)
    이 부흥회를 가능케해서 전국을 휩쓸게 한 물결은 두 군데서 흘러왔다 . 한 흐름은 선교사들의 기도회에서 연원했다 . 1903 년 원산 (元山) 에 있던 감리교 선교사들이기도와 성서 연구를위한 기도회를 갖기 시작했는데 , 여기에 장로교와 침례교 교인 들까지 가세하게되었고 , 이때 남감리교 선교사 의사 하디 ( RA Hardie 박사 ) 는 몇 해 동안 애써온 자신의 선교 활동의 열매 없음에 고민하던 중 선교사로 오게된 자신의 동기에 대해 회개하게되면서 급기야 뜨거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되었다 .

    1904 은 년 원산의 집회는 반복되었다 . 이번에는 삼파 연합의 사경회 도중 장로교의 로브 ( 레브 AF 의 Robb ) 가 특별한 성령의 감화에 젖어 , 한국인으로서 당시 은혜에 깊이 젖어 있던 전계은 (全 启 恩) 과 함께 원산 거리를 누비며 가슴을 치면서 통회 전도를했고 , 감리교의 정춘수 (郑春洙) 역시 그 부근을 왕래하면서 감격과 열의로이 성령의 은사를 선포 하였다 .

    또 하나의 흐름이 바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깊은 신앙 생활의 경건에서왔다 . 사경회의 영향 , 국가의 비운에 통회하는 기독교인들의 내성 (内省), 그래서 하나님 밖에는 기댈 곳이 없다는 한국인들의 신앙에서이 부흥의 물결은 도도히 흘러 왔던 것이다 .

    목사 영계 (靈 溪) 길선주 (吉 善 宙)! 한국 최초로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던 그의 성령에의 뜨거운 열정이 바로 1907 년 대 부흥의 직접적 동기가되었다 . 이처럼 부흥의 용솟음치는 성령의 샘은 원산의 전계은 , 정춘수와 아울러 평양의 길선주이 세 한국 목사의 신앙 체험에서 연원했고 , 따라서 그 부흥 뒤의 은 한국 교회의 신앙도 이들의 영성이 농도 짙게 그 언저리에 스며 있게 된 것이었다 .

    3. 1907 년 1 월 13 일 , 평양 장대현
    전날 하디 선교사의 집회로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 부흥회는 다음 주일 밤 길선주가 인도한 집회에서 그 성령의 불길이 터져 올랐다 . 교인들의 감동은 놀라웠다 . 교회는 ' 신비스러운 경험 ' 을 하였다 . 교회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 그 사이사이에 힘있는 영적 압력이 베어 구속하는 듯하였다 .

    다음날 월요일 밤에도 장중한 신비의 세력이 임재하고 있었다 .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설 때 확실히 체감으로 거기서 성령의 임재를 압도 당 하듯 느끼고 있었다 . 그 날 전형적인 평양 대 부흥의 분위기가 감격 넘치게 펼쳐지고 있었다 . 런던 타임즈의 기사에 의하면 이 " 아버지여 ! 라는 말을하자마자 을 밖으로부터 흠뻑 밀려드는 강대한 힘의 임재에 압도 당했다 " 고한다 나의 .

    교인들은 눈물과 감격으로 밤새워기도했고 , 그 감동의 격류는 몇 일 밤낮을 계속했다 . 통성기도의 음성은 신비로운 조화와 여운을 가지고 있었으며 , 통회의 울음은 성령의 임재에 압도되는 영혼의 넘치는 찬양의 물결 같았다 . 그 통회 자복의 광경을 묘사하는 한여 선교사의 기록에 의하면 , " 저런 고백들 ! 마치 지옥의 지붕을 열어 젖힌 것과도 같다 . ... 이루 상상할 수도없는 저 죄악의 고백들 , 부끄러움도없이 ! 사람 이 무엇으로 이런 고백들을 강제할 수 있으랴 ? 많은 한국 교인들이 하나님에의 두려움에 , 마루에 얼굴을 가리우고 슬피 탄식 하였다 " 고한다 .

    4. 새벽 예불이 새벽기도로
    한국의 최초의 영적 대각 성 운동이 식을 줄 모르고 빠르게 확대되면서 , 한국 교회 역사의 새 불을 지폈다 . 그토록 뜨거운 죄고 백과 회개를 불러일으킨 성령의 역사는 식을 줄 모르고 밤을 새우는 게 보통이었고 , 또 새벽부터 낮동안 계속 연장되었다 .

    지나가다가 성령의 불을받은 사람 , 스스로 일어나 죄를 고백하며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하면서 예수를 영접한 그들에게 그동안 행해져 왔던 것이 있었다 . 그것은 기독교 신자가되기 전에 이날까지 해왔던 불교의 새벽 예불 기간이었던 것이었다 .

    어떤 특정한 기간이 아니더라도 새벽만되면 예불을 드려 왔 던게 그 당시에 비크리스쳔들에게 보편적으로 있었던 정기 행사였다 .

    그때 길선주 장로는 이왕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 그동안 행했던 새벽에 불을 없애지 말고 , 하나님께 새벽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이어가 자고 나오게되었다 .

    그것이 오늘날의 새벽 예배의 원류이다 .
    선교의 토착화에있어서 그 나라의 전통 문화를 기독교적으로 토착화시킨 긍정적인 예라고 할 수있다 . 어떤 이들은 새벽 예배가 성경에 나온 것이며 , 예수님도 행하셨다는 근거 자료들을 내걸지만 , 그것은 한국의 새벽 예배를 교리적으로 합리화시키는 작업일 뿐이다 . 그렇다고 치면 , 현대에 생긴 종교적 산물을 성경의 문자로 들이댄다면 이단될 것이 뭐가 있겠나 .

    5. 토착화의 신앙화

    토착화 신학을 이상한 이단 쯤으로 보는 사람들도있어서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낸다 .
    우리나라의 새벽 예불을 새벽기도로 기독교가 더 좋게 활용한 예를 토착화라고한다 .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 그것을 복음 전파와 신앙인의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충분히 기독교가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있다 .
    중동 아랍 땅에 기독교를 전파한다면 ,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을 부르는 ' 알라 ' 라고 부르지 않겠는가하는 말이다 . 한국에 ' 엘 ' 이나 '의 '신의 로 전하지 않고 , 우리의 고유 언어인 하나님을 썼으니이 또한 선교 언어의 토착화 작업이 아니겠는가 ?
    새벽기도는 긴 세월을 거쳐 오늘날 산업 사회의 불편 함으로 자리잡게되었다 .
    주 5 일근 무제 확대로 인해 주일 성수의 문제도 민감 사안으로 떠오르게되었다 . 과연 토요일로 예배를 옮길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어떻게해야 하나하며 신학자와 정치가들이 고민이 말이 아니다 .
    그러나 , 그 의미를 예수님의 새벽기도와 초대 교회의 축제적 예배의 전통을 따르는 자손으로서 , 다시한번이 시대로 토착화시킬 필요가있다 .
    기존의 새벽 예불 드리는듯한 새벽 예배가 아니라 .
    새벽 예배 후 , 아침 식사와 출근을 동시에 할 수있는 여건도 생각해 볼 수있다 .
    그러나 건조한 사회에 살면서 영성의 유지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면 , 우리 또한 피폐된 조이 조각처럼 허공을 날라 다닐 지 모른다 .
    자신의 영성 생활을 소중히 지키며 ,
    급속도로 변하는 시대를 해석할 줄 아는 눈과 ,
    성경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기울이는 귀와
    기도를 통해 삶을 역동적으로 이끌어가는 힘찬 발과
    일기를 써내려 가듯 섬세하게 자신을 통제할 줄 아는 손과
    자신을 하나님 앞에 굴복할 줄 아는 무릎과
    공동체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려는 아침의 달콤함을
    그 어떤 바쁨과 바꿀 수 있을까 ?
    그것을 시간과의 싸움 , 잠과의 싸움도 필요하다고 본다 .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맘에도없는 억지로의 참여가 자신을 더 타성에 젖게할 수도있다는 것은 알려주고 싶다 .

    새벽기도를 드리고있는 자신의 실존 체험 , 정체성 회복을 중요시하지 않으면 .
    자신은 새벽 예불을 드리게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고 본다 .
    기독교는 당시에 새벽 예불의 형식을 들여 오면서
    결코 감격적이고 , 역동적인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출처 : 국민 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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