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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른 우리말 사용
    EDUCATION 2009. 10. 17. 19:20

    우리말 바로 쓰기

    나채운 교수/


    책을 내면서:


    언어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에 대해서는 새삼스레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은 자신이 잘못된 말을 쓰면서도 그 사실조차 알지 못 하는 경우가 많거니와, 만일 그러한 일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매체에까지 행해진다면 그 미치는 영향은 더욱 클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오용은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시정하도록 깨우쳐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까지도 그 사실을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오랜 시일이 지난 다음에는 시정하기가 더욱 어려운 단계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필자는 성서학을 전공한 사람이면서, 그러한 언어에 관심을 가지는 한 사람일 뿐 전적으로 언어학이나 국어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고, 대학원에서 국어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국민들의 절대다수가, 그것도 아주 중요한 말을 잘못 쓰는 것들을 보고 답답한 마음에서 그 잘못을 바로잡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국어학을 전공한 저명한 국어학자도 많고, 영어학을 전공한 교수도 많지만 어느 한 사람도 이러한 점에 관심이 없기에, 부전공자인 필자가 이러한 글을 쓰는 것이다.

    사실은 지난 2002년 6월 월드컵 경기가 우리나라에서 열리기 전에 전국적으로 도로 표지판에 영어가 잘못 쓰인 것을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무식을 보이지 않게 시정하도록 당국에 알리고 건설부장관에게까지 권고의 글을 보낸 바 있었으나, 일부가 수용되었을 뿐 아직도 거의 시정되지 않고 있으며, 그보다도 일상용어 중에 점점 더 심각한 오용의 사례가 늘어감을 보고 이 글을 쓰는 바이다. 필자는 이 글을 써서 몇 일간신문에 게재를 부탁하였으나 언론기관에서도 무관심하여(역시 그러한 오류를 범하면서) 몇 개 주간지에 공개하다가 이번에 일곡문화재단의 특별한 배려로 이 소책자를 출판하게 된 것이다. 이 일을 주선해 주신 김경래 장로님과 출판을 맡아 주신 일곡문화재단 최재선 이사장님께 심심한 감사를 드려 마지않는다.

    이제 아래에 요즘 우리 사회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잘못 쓰고 있는 중요한 말들을 들어 그 잘못 된 점을 해설하거니와, 이 책자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말 바로 쓰기 운동에 동참해 주신다면 필자의 기쁨은 더할 나위가 없겠다.

    일러두기

    1. 이 책에서 다룬 어휘들은 우리의 일상용어 중에서 극히 중요하면서도 널리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들을 택하여 바로잡고 해설한 것들이다. 우선 60여 개 항목을 다루어보았다.

    2. 수록된 어휘는 다음과 같이 크게 5개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다:

    1) 일본의 자기정당화에 동조하는 말
    2) 의미상 틀린 말이나 합당하지 않은 말
    3) 역사에 따라 생멸하는 우리 말
    4) 기독교적인 특수용어 바로쓰기
    5) 혼용과 오용의 일반용어

    3. 수록된 어휘 중 일부는 시정되어 가는 것도 있으나, 대개는 아직도 거의 모르고 사용하는 것들로서, 그 중요성으로 보면 시정이 시급한 것들이다(예: ‘종군위안부’)

    4. 각 항의 어휘 내용 해설 뒤에는 한 줄의 요약을 첨가하여 독자들의 기억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5. 이 책에 수록된 어휘들은 먼저 방송 매체나 언론기관에서 솔선수범하여 바로잡아 나가야 할 것들이며,
    필자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전국적으로 바로잡기 운동을 펼치고자 한다. 독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바라 마지않는다.


    I. 일본의 자기 정당화를 용인하는 말

    1) '종군 위안부'(從軍慰安婦)

    이 말은 일본인들이 일제 말기(태평양전쟁 때) 우리나라의 미혼여성들을 강제 징용하여 일본군의 전쟁터에까지 끌고 가서 성행위를 하게 한 것을 미화시켜서 표현하는 말로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따라서 쓸 말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그 말을 쓰면, 당시 우리나라 여성이 자원하여 일본 군인들을 위안하기 위하여 종군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니, 이는 우리 자신이 그들을 모독하는 일이 된다. '부'(婦)라는 말도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말은 주로 성년 및 기혼의 여자를 일컫는 말이지 어린 처녀를 일컫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16,17세 정도의 어린 처녀를 강제 징용하였으므로 이를 속칭 '처녀공출'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당시 남자징용은 사할린(당시 '카라후도' 樺太') 남양 등지로 가서 강제노동을 했지만 처녀들은 주로 일본군인들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종군'도 거짓이요, '위안'도 거짓이요, '부'도 거짓으로서, 일제가 자신들의 악한 행위를 거짓으로 정당화하여 쓴 말을 우리가 어찌 그대로 따라서 쓰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에 대한 필자의 바른 말 대안(代案)은 '강제징용녀'(强制徵用女), 또는 '강제성징용녀'(强制性徵用女)이다. 영어로는 Japanese army sex slave(일본군 성노예)라고 쓰는데 그 말을 직역하여 쓰기에는 '노예'라는 말이 너무 가혹한 느낌이 들어서 달리 쓴 것이다. 또한 '정신대'(挺身隊)라는 말도 쓸 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정신'(挺身)이라는 말은 무슨 일에 남보다 앞서서 자진하여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 한국의 어린 처녀들 중에 한 사람도 자진해서 일본군대에 간 사람은 없었다. 이 말도 역시 일제가 자기정당화를 위하여 쓴 말인 것이다.

    - 일본이 자기들의 만행을 정단화하기 위해 쓴 말을 우리가 따라서 쓸 수 없다

    2) 을사보호조약

    1905년에 일본이 우리나라(당시 대한제국)를 강제로 조약을 맺게 하여 외교권과 군사권을 강탈하여 사실상 우리나라의 주권을 장악하게 된 사건을 흔히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라고 부르거니와(우리나라 국사학자들도 오랫동안 그들의 저서에 그렇게 썼다), 이 말도, '종군위안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이, 또 우리 측 친일파들이 그것을 정당화하고 미화하기 위해서 일컬은 말이므로 우리로서는 쓸 말이 못된다. 일본의 강제와 친일파들의 매국적 행위로 체결한 이 조약은 바로 그 다음 강제 합방에로 가는 직전 단계 수순이다. 즉 일본이 우리나라를 주변 열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민지로 삼기 위한 수순에 불과한 것이다. 언제 우리나라가 일본의 강요 없이 대등한 관계에서 자진하여 우리나라를 외세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조약 체결을 한 적이 있었던가? 이것은 일본이 강제로 우리의 일부 통치권을 늑탈한 조약이므로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근에 일부 역사학자들 간에는 '을사늑약'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일본의 강요로 맺은 이 조약은 보호조약이 아니라 외교·군사권을 늑탈한 '을사늑약'이다.

    3) 한일합방

    위의 경우와 같은 논리를 적용한다면, 1910년의 소위 '한일합방'(韓日合邦)이란 말도 우리가 쓰는 말로는 합당한 말이 못된다. 왜냐하면 조약이란 국가 간에 대등한 지위와 권력으로 체결되는 것인데, 이 경우는 전적으로 일본 측의 강압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도 우리로서는 '강제'라는 말을 넣어 '한일 강제합방'이라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실로 말하면 일제가 패망하여 물러간 직후 우리나라는 강요에 못 이겨 체결한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의 무효를 선언했어야 상징적인 의미로라도 독립주권 국가로서의 위신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 1910년의 한일합방은 강제 합방이므로 국제법상 무효이다. '강제합방'이라 해야 한다.

    4) 대동아전쟁

    아직도 많은 사람들(주로 70-80대의 노령 층)이 일본이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자행했던 소위 '대평양전쟁'을 당시 일제가 부르는 말을 따라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가 쓸 말은 아니다. 일제는 당시 서구의 몇 강대국이 동양 제국으로 세력을 확장해 오는 소위 서세동점(西勢東漸)을 대동단결하여 막고 동아세아 제국이 함께 번영하는 소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이루기 위한 전쟁이라고 자칭한 것이다. 이 말의 뒤에 숨은 일본의 속셈은 물론 일본이 동아세아 여러 나라를 자기의 지배 아래 두고자 한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 대동아전쟁은 일본의 야심을 드러낸 말, 바른 말은 대평양전쟁이다.


    II. 의미상 틀린 말이나 합당하지 않은 말

    5) 평가절하

    이 말은 한자로는 '評價切下'가 아니고 '平價切下'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다른 사람을 낮게 평가하는 뜻으로, 즉 과소평가와 같은 뜻으로 알고 잘못 쓰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순전히 경제적인 술어로서, 고정환율에서 한 나라의 통화의 대외가치를 떨어뜨리는 일로서, '換切下'와 같은 뜻의 말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과소평가' 대신으로 쓰기 때문에 '과소평가'라는 말은 거의 쓰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이다.

    - '평가절하'는 환율에 관한 경제술어로서 평가와는 무관 말이다. '과소평가'라 해야 한다.

    6) 상생(相生)의 정치

    여기서 '상생'이란 말은 정치인들이 여당과 야당 간의 관계를 잘 지속해 나가자는 뜻으로 많이 써왔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相生'의 뜻은 오행(五行)의 운행에서 금(金)은 물(水)을, 물은 나무(木)를, 나무는 불(火)을, 불은 흙(土)을, 흙은 금을 생기게 해 주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은 바로 '상극'(相剋)과 대응이 되는 말로서, 상극의 뜻은 위의 다섯 가지가 그 반대로 이기는(죽이는) 것을 뜻한다. 정치인들이 여·야 당간에 서로 협력 화합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할 때는 '상생'이 아니고 '공생'(共生, 함께 삶)이란 말을 써야 한다.

    - 서로 죽이지 말고 함께 살자는 뜻의 말은 '상생'이 아니고 '공생'이다.

    7) 안보불감증(安保不感症)

    이 말을 많은 사람이 '위기불감증'(危機不感症)이란 뜻으로 잘못 쓰고 있다. 이 말로 나타내는 의미는 국가 안보에 대한 의식이나 감각이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것의 이면적(裏面的)인 뜻이지 정면적(正面的)인 뜻은 되지 못 한다. 그 말이 나타내고자 하는 뜻은 안보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 대한 의식이나 감각이 없다는 것이므로 그러한 뜻의 바른 표현은 '안보불감증'이 아니라, '위기불감증'인 것이다.

    - 말하고자 하는 뜻을 바로 나타내는 말은 '안보불감증'이 아니고 '위기불감증'이다.

    8) 해방과 광복

    이 두 말은 똑 같은 말이 아니므로 엄밀하게는 구별해서 써야 한다.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미·영연합군에 항복함에 따라 우리나라는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이 되었는데, 이것은 소극적(수동적)인 면에서 말하는 것이고, 적극적인 면에서 본다면 우리나라가 잃었던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되찾게 된 '광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8월 15일을 '해방절'이라 하지 않고 '광복절'이라 부르고, 그러한 뜻으로 기념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중경(重慶)으로 피해갔던 우리의 '상해임시정부'도 광복군을 조직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싸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광복군을 포함한 연합군은 마침내 우리나라를 다시 주권 독립국가로 광복을 맞게 한 것이다.

    - 1945년 8월 15일의 참 뜻은 일제로부터의 해방보다는 조국의 주권 광복에 있다.

    9) '독립기념관'

    우리나라가 일제 통치하에서 겪은 고난과 독립운동의 역사 등에 관한 기록과 역사적 자료 등을 전시해 놓고 후세인들의 교육의 장으로 마련해 놓은 기념관을 '독립기념관'이라 명명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합당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수 천년의 역사 가운데서 때로 외세(주로 명 청 등 중국)의 간섭을 받은 적은 있으나, 독립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데, 마치 역사상 처음으로 일제로부터 독립을 성취한 것처럼 '독립기념관'이라 한 것은 합당치 않다. 따라서 이 기념관 건물의 명칭도 '광복기념관'으로 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으로서는 독립보다 광복에 더 큰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10) '동방예의지국'

    이 말도 많은 사람들이 동방의 '禮儀之國' 즉 동방에 있는 예절을 잘 지키는 나라란 뜻으로 알고 있는데, 그 한자 표기는 '禮儀之國'이 아니고 '禮義之國'이다. 여기서 '禮儀'는 인간 간에 지키는 예절을 말하는데 대해, '禮義'는 '예절'과 '충의'(忠義) 즉 임금에 대한 충절(왕정시대가 아닌 지금으로 말하면 나라에 대한 충성)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의지국'禮義之國이라 함은 인각간의 예절을 잘 지키고 임금에게 충의를 다 하는 나라 즉 충효를 다 실천하는 나라란 뜻이다.

    - 부모에 대한 효도와 왕에 대한 충의를 말하므로 '禮義之國'이 옳다.

    11) 일제 36년 간

    1945년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던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일제의 통치를 받은 기간을 '36년간'이라고 많이 써왔다. 3·1절이나 광복절 행사에서 정부요인들의 경축사에서도 그 말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 말은 옳지 않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합방한 날은 1910년 8월 29일이요,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은 1945년 8월 15일이므로 정확하게 말하면 34년 11개월 14일로서 35년에도 2 주간이 모자라는 기간이다. 이 수모(受侮)의 통치기간을 우리가 어찌 1년을 늘려서 쓸 필요가 있는가. 바른 말로는 '일제 35년간'이라 해야 한다.

    - 주권을 빼앗기고 식민지 통치를 받은 수모의 기간을 늘려서 말할 수 없다.

    12) 종교개혁

    16세기에 가톨릭교회의 타락과, 특별히 교황의 면죄부 발행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루터에게서 시작된 큰 개혁이 마침내 개신교를 탄생케 한 운동을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이라 일컫는데,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말이다. 이 말에 대한 영어는 The Reformation 으로서, 문자 그대로 '개혁'이란 말이지, 거기에 '종교'라는 말은 전혀 없다. 이 말은 동양에서는 한자어로서 먼저 중국에서 썼고, 같은 한자를 쓰는 일본과 우리나라가 그것을 따라 '종교개혁'으로 쓰고 있는데, 우리로서는 그렇게 쓸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서양에서는 그 당시 종교라면 그대로 기독교(넓은 뜻)를 의미했지만, 동양으로 말하면 불교 유교 도교... 등 여러 종교가 있으므로 그 의미를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하여는 '기독교개혁'이라 함이 옳은 것이다.

    - 16세기 서구의 종교는 기독교였으므로 '기독교개혁'이 옳다.

    13) 초대 교회

    이 말은 주로 기독교에서 많이 쓰는 말이지만, 그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와는 맞지 않는 말이다. 바른 말은 '초기 교회'(初期敎會)이다. 영어로 말하면 early church 이지 first church 가 아니다. '초대'(初代)라 하면 어떤 직위의 선후를 나타내는 것이지 어떤 시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초대 대통령' '2대 대통령'과 같은 경우이다. '초대 교회'라 하면 2대 교회, 3대 교회 등을 예상하게 되는데 성경이나 교회 역사상에 그러한 말은 없으며, 성경(사도행전 제2장)에서 말하는 사도들의 교회를 나타내는 말이 못 된다.

    - 시대의 순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초기교회'가 옳다.

    14) 대부분의 사람

    많은 사람을 나타내어 말할 때 가장 많이 쓰기를 '대부분의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말이다. 사람이 많고 적은 것은 수로써 나타내는 것으로서 '대다수의 사람'이라고 해야지, '대부분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다. '대부분'이란 말은 사람이나 물체의 수를 나타낼 때 쓰는 말이 아니라 어떤 공간의 넓고 좁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컨대, "오늘 대부분의 지역에서 비가 온다"와 같은 경우이다.

    - 사람의 많고 적음은 수로 말하는 것이므로 '대부분의 사람'은 있을 수 없다.

    15) 사고 많은 곳

    교통안전을 위한 경고판에 '사고 많은 곳' 또는 '사고다발지역'(事故多發地域) 등으로 쓰인 것을 보는데, 이는 잘못된 말이다. 사고는 결코 많고 적은 분량(quantity)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빈도(頻度, frequency)로 나타내는 것이므로 '사고 잦은 곳'으로 하는 것이 바른 표현이다. 이 표지판에 대해서는 2002년 월드컵 경기 1년 전에 필자가 이 표지판을 포함한 많은 표지판이 잘못된 것(주로 영문)을 시정하도록 정부(건설부장관)에게 건의한 바 있어 '사고 잦은 곳'으로 시정된 곳도 있으나 아직도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사고는 양이 아니라 빈도수로 말하는 것이므로 '사고 잦은 곳'이 옳다.

    16) 세쌍동이

    많은 사람이 흔히 잘못 쓰고 있는 말 중의 하나는 '세쌍동이' '네쌍동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쌍'(雙)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둘을 나타내는 것이지 셋이나 넷을 나타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른 말은 '삼태아'(三胎兒) 또는 '삼생아'(三生兒)이다. 그런데 '세쌍동이' '네쌍동이'라는 말은 국어사전 상으로도 인정하여 '쌍동이'에 대한 사전상의 정의 즉 "한 태에서 둘이 나온 아이"와 그 자체 모순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쌍동이'에 대한 한자 표기는 '雙童이'가 아니고 '雙동이'이다. 왜냐하면 금방 난 영아는 '동'(童)이라 하지 않고 '아'(兒)라고 하기 때문이다.

    - '쌍'이란 말은 둘을 뜻하므로 '세 쌍둥이'란 말이 성립될 수 없다.

    17) 점입가경(漸入佳境)

    이 말도 거의가 잘못 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또한 언론기관까지도, 어떠한 일이 점점 잘못되어 가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쓰고 있는데, 그것은 '가경'이란 말을 잘못 알아서, 전적으로 반대되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즉 '점입가경'이란 말은 어떠한 일이 점점 잘되어 가는 상태(佳境)를 나타내는 말이며, 점점 더 아름다운 경지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 점점 험한 경지로 들어간다는 말을 '가경'이라 함은 정반대가 된다.

    18) 방금 전

    많은 사람들이 흔히 쓰는 '방금 전'(方今 前)이란 말도 잘못 쓰고 있는 것이다. '방금'이란 말은 '바로 이제'라는 뜻으로 현재를 나타내고, '전'이란 말은 과거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이 두 말이 하나로 결합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말은 '바로 조금 전'(순간의 과거)이란 말을 잘못 쓰고 있는 것이다.

    - 바로 현재의 순간을 말하는 '방금'과 과거를 말하는 '전'은 시간으로 병행될 수가 없다.

    19) 잘못된 과잉표현

    '육식을 먹는다' 또는 '채식을 먹는다'라는 말도 많이 쓰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육식'(肉食)이나 '채식'(菜食)이란 말은 그 자체에 이미 '먹는다'라는 말이 있으므로, '육식을 먹는다'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의 과잉표현(過剩表現, redundancy)이 되는 것이다. 그냥 '육식을 한다'라 하고 '채식을 한다'라고만 하면 되는 것이다.

    - '채식'의 '식'(食)과 '먹는다'는 '식'이 이중으로 쓰여 과잉표현이 된다.

    20) 피로회복제

    많은 사람이 잘못 쓰는 말인지도 모르게 잘못 쓰는 말 중의 하나는 '피로회복제'라는 말이다. 누구도 전에 피로했던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피로회복제를 달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약국의 약사도 '피로회복제'라고 말하면서 팔고 있다. 이러한 간단하고 쉬운 말도 언
    어감각이 없으면 전혀 잘못된 줄도 모르고 쓰는 것이다. 이것은 '피로해소제'라 해야 바른 말이다.


    III. 역사에 따라 생멸하는 우리말

    25) 사라져간 우리말

    우리나라는 1446년에 세종대왕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한글(당시 훈민정음)을 만들어 놓았으나 한문자를 숭상하는 정신 때문에 오랫동안 '언문'이라 천시를 당하면서 사용되지 못 하고 오히려 한자어로 우리말을 대신하게 되어 마침내는 순 우리말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예를 들면 숫자를 말할 때 '하나'에서 '아흔 아홉'까지는 순 우리말을 썼지만 '백' '천' 등의 우리말은 잃어버린 지가 오래여서 지금은 그 말을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옛날에 썼던 순 우리말로 하면 '백'은 '온'이고 '천'은 '즈믄'이고, '만'은 '골'이고, '억'은 '잘'이고, '조'는 '울'이었다. 그 외에도 '가람'(강), '하다'(많다, 크다), '열음'(열매), '미르'(龍) 등의 순 우리말은 전혀 쓰이지 않고, 고어사전에만 남아 있다.

    - 사라져간 우리말은 한자어의 숭상 우세와 우리말 천시 때문이었다.

    26) 사라져갈 우리말

    최근에 우리말에는 영어가 지나치게 사용되어 많은 순 우리말이 머지않아 사라져갈 운명에 놓여 있다. 예를 들면 '오픈'(open)이란 말 때문에 '개점' '개업' '개원' '개관' 등의 우리말이 오래 전부터 거의 쓰이지 않고 있으며, 건물의 층수를 쓰는 데도 '1층' '2층' 대신에 '1F' '2F' 등을 쓰는 것이 통례가 되어 있다. 그 외에도 '컨설팅' 때문에 '상담'이, '인테리어' 때문에 '내장업'이, '겔러리' 때문에 '화랑'이, '웨딩드레스' 때문에 '신부 예복'이, '와이프'나 '집사람' 때문에 '아내'라는 좋은 말이 수 십년 안에 살라질 운명에 놓여있는 것이다. 장래 일은 고사하고 현재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편할까를 생각하면 심히 답답하기도 하다. '창업(년)' 또는 '이래'(以來) 대신 'since ...' 라고 쓰고, 심지어 접속사 '와' 나 '과' 대신에 '&'를 쓰는 것은 참으로 지나친 것이 아닐 수 없다.

    - 사라져갈 우리말은 주로 영어의 강세 때문이다.

    27) 거의 실용성이 없는 외국어의 한글 표기

    영어의 남용은 지나쳐서 영어를 한글로만 표기하여 실제로 대다수의 한국인에게도 외국인에게도 거의 실용성을 갖지 못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서울시내 관광버스에 쓴 '서울시티투어'라는 안내문구는, 그 말이 영어여서 한글을 아는 한국인도 '시티투어'라는 영어를 모르면 그 표기를 알 수가 없고, 외국인에게는 그 말은 알고 있지만 한글을 모르면 그 뜻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페스티벌'(festival), '포토'(photo), '펀드'(fund), 노블리스 오블리즈(noblesse oblige, 프랑스어) 등 많다.

    이러한 말은 그 정도의 영어를 아는 사람을 제하고는 한국인에게도 외국인에게도 알 수 없는 말이다.

    - 외국어를 모르면 한국인도 외국인도 모를 말을 누구를 위해 쓰는가?

    28) 암 진단과 '사형선고'

    많은 사람이 병원에서 암 진단으로 시한부 생명이 된 것을 말할 때 비유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말은 옳지 않다. 사형선고란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 형벌로 내리는 것을 말하는데, 암 진단을 받고 시한부 생명으로 된 것을 그런 형벌과 같은 말을 쓰는 것은 전혀 합당하지 않다. 이런 경우에 바른 말은 '죽음의 선고'이다.

    성경에서도 사도 바울이 죽음에 이를 만큼의 심한 고생을 했다는 표현을 "사형선고를 받은 줄 ..."(고린도후서 1장 9절)이라고 하고 있는데 그것도 잘못된 것이다. 영어성경으로는 '사형선고'라는 death penalty 나 capital punishment 를 쓰지 아니하고, '죽음의 선고'로서 death sentence 를 쓰고 있다.

    - 암 진단은 비유적으로도 결코 '사형선고' 아니고 '죽음의 선고'이다.

    29) 아직도 쓰고 있는 구시대의 언어 '따 지' 와 '놈 자'

    옛날부터 한문의 초보인 천자문(千字文)을 배울 때, 그 첫 마디인 '천지'(天地)를 읽을 때 가르치는 훈장(訓長)이나 따라 읽는 서동(書童)이나 다 '하늘 천, 따 지'라고 읽어 왔다. 그런데 여기서 '지'(地) 자를 아직도 '따 지'로 읽는 것은 몇 백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구시대의 읽기인 것이다. 즉 '땅'을 '따'라고 말하던 시대의 읽기인 것이다. 그런 것을 아직도 '땅 지' 자라 하지 않고 '따 지' 자로 읽으니, 시대 역행도 이만 저만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또 하나는 '놈 자'(者)의 경우이다. 중세기까지의 우리말에서는 '者' 자는 훈독(訓讀)으로 '놈 자'라고 하였는데, 당시로서는 '놈'이란 말이 오늘날처럼 상스러운 말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한 가지 증거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한글)응 창제할 때 그 서문에서 백성들을 가리켜 "뜻을 펴지 못 할 놈이 많은지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놈'이란 말은 결코 오늘날처럼 하대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사람'이란 말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놈 자'(者)를 훈독하는 데도 마땅히 '사람 자'라고 해야 한다.

    - 오늘날의 말로는 '따'는 '땅'이요, '놈'은 '사람'이다.

    30) 특별한 한자에 대한 특이한 읽기

    한자어 중에는 혹은 원어의 읽기를 따라서, 혹은 발음상의 편의에 의해 일반적인 읽기와는 달리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중의 '나무'(南無) 는 "귀의하다"라는 말을 음역한 것이고, 그 외 발음상의 편의를 따라, '六月'을 '육월' 아닌 '유월'로, '十月'을 '십월' 아닌 '시월'로, '初八日'을 '초팔일' 아닌 '초파일'로, '十方'을 '십방' 이 아닌 '시방'으로, '사파'(沙婆)를 '사파' 아닌 '사바'로, '智異山'을 '지이산' 아닌 '지리산'으로, '菩提樹'를 '보제수' 아닌 '보리수' 등으로 읽는 경우이다.

    - 위의 여러 말은 상식 이상의 것도 있고 상식적인 것도 있으나, 모르면 상식 이하가 된다.


    IV. 기독교적인 특수용어 바로쓰기

    31) 별세를 뜻하는 '소천'(召天)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흔히 '소천'이라 부르는데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죽음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완곡어법(婉曲語法)을 써서 고인의 신분과 종교적 전통에 따라 여러 가지 표현을 쓰는 것이 통례이다. 일반적으로 쓰는 별세(別世), 작고(作故), 타계(他界), 서거(逝去) 등 외에 왕에게는 붕어(崩御) 또는 승하(昇遐), 불교인에게는 입적(入寂) 또는 열반(涅槃), 가톨릭 교인들에게는 선종(善終) 등을 쓰는데 개신교인들은 주로 '소천'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국어학적인 문제가 없지 않다. 보통 한 낱말이 동사와 명사로 이루어졌을 때는 먼저 동사가 오고 다음에 명사가 올 경우에는 그 명사는 동사의 목적어(대격)가 되는 법인데, 그렇다면 이 말의 문자적인 뜻은 "하늘(=하나님)을 부른다"가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과는 정반대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법적인 지식을 누구나 갖는 것이 아니기에 이 말은 널리 비판 없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국어사전에도 없는 이 말이지만, 언어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성격을 수용하여 근사치의 해석으로, "하늘(=천국)에의 부르심"('하늘'을 처격으로 하여)이라 이해하여 "소천을 맞으셨다" 또는 "소천을 당하셨다"라고 하면 될 것이다. 혹은 '소천' 대신에 '서천'(逝天: 하늘로 가시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일본 기독교인들은 성도의 죽음을 '승천'(昇天)이라고 쓰는데, 이는 기이하게도 우리말의 '소천'(召天, 일본어로 しょうてん, 쇼오텡)과 발음상으로는 똑 같아서 일본사람들도 '소천'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은 문법적인 문제는 논외로 하고 점차 정착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 말을 국어사전에 올려야 하느냐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 점은 '축복'(祝福)이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 기독교인은 '소천'이란 말을 바로 쓰고, 국어사전은 이 말을 사전에 올려야 한다.

    32) 기독교 용어로서의 '축제'

    기독교인들은 '축제'(祝祭)라는 말을 쓸 수 없으며 '잔치'라는 말을 써야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그것은 옳지 않다. 축제를 쓸 수 없다는 이유는 '축제'의 '제'(祭)는 유교의 제사와 같은 행사 즉 우상을 섬기는 것을 뜻하므로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자에서 '祭' 자는 반드시 그러한 제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축하행사(영어의 festival)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 '祭'(마쓰리) 자를 많이 쓰는 일본어 사전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흔히 쓰는 '전야제'(前夜祭)나 '사육제'(謝肉祭) 라는 말에서 '제사'(祭祀)는 신에 제사한다는 의미가 전혀 없고 어떤 일을 축하하고 즐기며 노는 행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영한사전에서도 'Festival'을 '축제'(祝祭)라 기록하고 있다.

    - 기쁨과 즐거움으로 찬양하는 예배도 하나의 종교적 축제로 볼 수 있다.

    33) 기독교 용어로서의 '성가대'와 '찬양대'

    기독교 용어로서 '성가대'(聖歌隊)라는 말은 쓸 수 없고, '찬양대'라는 말을 써야 한다는 이론이 있으나 그것은 옳지 않다. 교인들이 부르는 찬송이나, 성가대가 부르는 찬양이나 그 가사의 내용은 성경에서 나온 것으로서, 거기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뿐 아니라 성도들의 죄를 회개하는 것도 있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는 것도 있고, 자신의 헌신을 결단하는 것도 있고, 천국에 대한 소망도, 교회의 사명에 관한 것 등도 있어 전 포괄적인 것인데, 이것을 찬양으로만 제한하여 나타내는 것은 찬송가나 성가의 내용(=성경)을 도외시하는 것으로서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거룩함을 나타내는 '성'(聖) 자는 가위 기독교 전용의 글자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聖經, 聖書, 聖殿, 聖堂, 聖職, 聖父, 聖子, 聖靈, 聖禮, 聖餐, 聖誕, 聖畵 등 필자가 조사한 것만으로도 50 여개 어휘가 있다(이 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나채운 지음 '주기도·사도신경·축도' 46-47면 참조). 인류 역사상 위인 성자가 여럿 있지만 그들의 출생, 예컨대 석가나 공자의 탄생까지도 결코 '성탄'(聖誕)이란 말을 쓰지 않고, '성탄'은 오직 예수에게만 사용되는 전용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이 기독교를 우리보다 먼저 받아 '성가대'라는 말을 썼는데, 그 후에 같은 한자(표의문자)를 쓰는 우리나라가 단순히 일본이 썼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쓸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언어가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소산이라는 본질을 모르는 소이(所以)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 찬양은 제한적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성가는 전 포괄적 개념을 가진 말이다.

    34) 말이 안 되는 '세례 요한'

    한국 교회가 아직도 예배용으로 많이 쓰고 있는 개역성경(1938년 발행) 은 당시 미국 선교사 주도로 번역된 것으로서 번역된 것으로서 어휘를 바로 쓰지 못 된 것이 없지 않은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세례 요한'이란 어휘이다. 이 말은 헬라어 원어에서 물론 '세례자 요한'이요 세계의 모든 번역성경이 다 '세례자 요한'으로 번역하고 있고, 같은 한자를 쓰는 중국과 일본어 성경에서도 사람을 나타내는 '-자'(者)를 붙여 '洗禮者'라고 쓰고 있는데 유독 한국 성경만이 최근 1998년의 개정성경 개정판에서까지 '세례 요한' 그대로 쓰고 있으니 이는 실로 언어도단(넌센스)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의 공생애 사역에 앞서서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증언하고, 예수에게 세례를 베푼 선구자로서 분명히 인물을 가리키는 말인데 '세례자 요한'이라 하지 않고 '세례 요한'이라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의 부당성은 '과학자 아인슈타인'이라 할 것을 '과학 아인슈타인'이라 하는 것, 이것을 영어로 말하면, 'Einstein a scientist' 라고 해야 할 것을 'Einstein a science' 라고 하는 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오류이다.

    - 사람을 가리키는 데 '-자'(者) 자를 안 쓰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35) 예수님 당시 유대나라의 주식은 떡이 아니고 빵이었다

    앞서 말한 개역성경에서는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유대인들의 주식이 한국의 떡인 것처럼 되어 있다. 즉 그들의 주식인 '아르토스' 곧 빵을 우리말에서 '떡'으로 번역한 것이다. 예컨대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유대나라의 빵으로 식사한 것을 언급할 때마다 "떡 잡수실 때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에 대한 다른 말 번역을 보면 영어에서는 'bread'로, 독일어에서는 'Brot'로, 불어에서는 'pain'으로, 라틴어에서는 'panis'로, 중국어에서는 '麵包'(빵)로, 일본어에서도 'パン'(빵) 등으로 바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서도 공동번역(1971년)이나 표준새번역(1993년) 등에서는 '빵'이라고 바로 번역되어 있으나, 아직도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오랫동안 써 오던 개역성경(1938년)의 '떡'을 그대로 쓰고 있다. 유대인의 주식은 빵이요, 떡은 한국인에게도 주식이 아닌 별식인데, 이 떡조차 유대나라에는 있을 리 없고,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으로서 주식인 빵을 잡수셨다.

    - 사실과 일치되지 않은 말은 바른 말이 아니다. 유대인의 주식은 떡이 아니고 빵이다.


    V. 혼용과 오용의 일반용어

    36) '시간' 과 '시각'

    많은 사람이 '시간'(時間)과 '시각'(時刻)을 정확하게 구별해서 쓰지 못 하고 있으나 이 두 어휘는 분명히 그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 '시간'은 어떤 시점에서 다른 어떤 시점까지의 사이의 길이(영어로 period of time)를 말하는데 대해, '시각'은 시간선상의 한 점(point of time)을 가리키는 점에서 분명히 구별된다. 오랫동안 '시각'이란 말은 거의 쓰이지 않고 '열차 시각표'라고 할 것을 '열차 시간표'로 써오던 것을 현재는 많은 역 안내판에서 '열차 시각표'로 바로 쓰고 있으나 아직도 보편화되지는 못 하고 있다.

    - 시간은 때가 지나가는 동안을 말하고, 시각은 한 시점을 말한다.

    37) 여러 가지 종류,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종류'란 말에는 '가지'와 '종류'가 중복되고 있으므로 옳지 않다. '종류'와 '가지'는 한자어와 순 우리말의 차이 밖에 없을 뿐, 뜻으로는 똑 같은 것이다. 다만 이중으로 쓰는 것이 잘못된 것이므로 그 중 하나만으로 '여러 가지'라고 하든지, '여러 종류'라고 하든지 하면 되는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 하는 기간 동안'이란 말을 쓰는데, 여기서 '기간'(期間)이라는 말과 '동안'이라는 말은, 전자는 한자어이고 '동안'은 순 우리말(고유어)라는 차이일 뿐 뜻으로는 똑 같으므로 필요 없는 중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는 동안에'라고 하든지, '...하는 기간에'라고만 하면 되는 것이다.

    - 같은 뜻을 가진 한자어와 순 우리말을 중복해서 쓸 수 없다.

    38) 그때 당시, 과반수, 유분수. 근십년

    '그때 당시'라는 말도 '그때'라는 순 우리말과 '당시'(當時)라는 한자말이 이중으로 반복되므로 과잉표현(redundancy)으로 잘못된 것이다. 다만 '그때'라고 하든지, '당시'라고 하든지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과반수'(過半數)가 넘는다" 라는 말도 같은 경우이다. '과반수'라 하면 '과' 자에 벌써 '넘는다'란 말을 썼는데 거기에다 '넘는다'라는 말을 이중으로 쓸 필요가 없다. "과반수가 된다"라고 해야 한다.

    "유분수(有分數)가 있지라"라는 말 가운데는 이미 '있다'(有)라는 말이 있으므로 이것도 과잉표현으로서, 다만 "분수가 있지"라고 하든지, "유분수이지"라고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근 십년(近十年) 가까이 ..."의 경우에도 '근'과 '가까이'는 중복이 되므로, "근 십년"이라고 하든지, "십년 가까이"라고만 하면 되는 것이다.

    - '그때'와 '당시' '과반수 ...' '유분수 ...' '근십년 ...' 등은 모두 중복어로서 과잉표현이다.

    39) 아들 딸에 대한 아버지 어머니의 별난 애칭

    '놈'과 '년'은 다 같이 흔히 연장자가 연소자를 나무랄 때 하대(下待)하여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둘 중에서 '놈'과 '년'은 그 정도에 차이가 있다. 그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

    아버지는 딸에게 '년'이라 말하지 않고 '놈'이라 말한다. 여성인 딸을 대하여 남성에게 쓰는 '놈'이라고 하는 이유는, '년'이 모욕감과 수치감을 주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고 애칭(愛稱)으로 '놈'을 쓰는 것이고, 어머니가 딸에게 '년'이라고 말하는 것은 같은 여성이기 때문에 결코 모욕이나 수치감을 주는 것이 아니고 애칭이 되기 때문이다.

    - 딸에게 쓰는 아버지 어머니의 '놈'과 '년'은 상말이 아니고 애칭(愛稱)이다.

    40) 전혀 문법에 맞지 않은 복합적 표현의 말

    일부 지방에서 언어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 통용은 되고 있어도 전혀 비문법적인 말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큰 일 날 뻔했다"라고 할 것을 "큰 일 날 뻔 당했다"로,

    "둘 밖에 없다" 라고 할 것을 "둘 밖에 뿐이다"로

    "하나 밖에 없다" 나 "하나뿐이다"라고 할 것을 "하나 뿐이 없다" 등으로 말하는 것이다.

    -표준어를 쓰고, 어법에 어긋나지 않은 말을 쓰는 것은 교양인의 기본요건이다.

    41) 우리말의 띄어 읽기

    쓰기에 띄어쓰기가 있는 것과 같이 읽기에도 띄어 읽기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거의 모르고 있다. 그 사례 몇을 들면 다음과 같다. '골다공증'(骨多孔症, 뼈에 구멍이 많이 난 병 증세)은 보통 '골다-공증'으로 띄어 읽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바른 읽기는 '골-다공증'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신라시대에 고승(高僧) 혜초(慧超)가 인도의 다섯 나라(五國)와 그 인근의 여러 나라를 10년 간 순례하고 그 행적을 기록한 여행기(727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말할 때 거의 모든 사람이 '왕오-천축국전'이라고 띄어 읽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 이 말에서 바른 읽기는 '왕-오천축국전'이라고 띄어 읽어야 한다. 즉 오천축국('천축국'은 인도를 가리킨 옛말)에 가서 쓴 전기라는 뜻인데 '오천축국'을 띄어 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띄어 읽기를 바로 하려면 그 말의 뜻을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42) 장음을 단음으로 읽는 것

    우리말은 중국어의 사성(四聲: 평성, 상성, 거성, 입성)이나 영어의 억양(抑揚, intonation), 강약(accent)처럼 많지는 않지만 전혀 없지는 않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신문사의 주장을 밝히는 '社說'(사:설)은 거의 십 중 팔구의 사람들이 단음으로 '사설'이라 말하는데, 바른 읽기는 장음으로 '사-설'이라 해야 한다(국어사전에서 장음의 표시는 : 이다) '사'를 짧게 발음하면 '私設'이나 '邪說'이 된다. '오가피'(五加皮)나 '오미자'(五味子)의 '오'도 길게 발음해야 하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짧게 잘못 읽는다. '교제'(交際)의 '교'(交)는 짧은 소리이지만 '교재'(敎材)의 '교'(敎)는 긴 소리이며, '개혁' '개정' '개선' 등의 '개'(改) 자는 길게 읽어야 하는데 노무현 대통령부터 언제나 짧게 잘못 읽는다.

    - 대통령을 포함해서 모든 국민에게 바른 말을 쓰는 것은 기본요건이다.

    43) 단음을 장음으로 읽는 것

    우리 말 중 '눈'은 1) 인간의 감각기관의 하나인 눈(目), 2) 하늘에서 내리는 눈(雪), 3) 초목의 싹이 막 터져 돋아나오는 자리, 4) 저울의 눈금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거니와, 둘째 의 '눈'만이 긴 소리이고 다른 말은 다 짧은 소리인데, 이것을 구별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어사전에서는 그 표시를 '눈:'으로 달리 나타내고 있다. '묻다'라고 쓰는 말에도 질문의 뜻으로 쓰는 '묻다'(問)는 긴 소리이나, 매장(埋藏)한다는 뜻으로의 '묻다'는 짧은 소리다.

    짐승의 하나인 '사자'(獅子)의 '사'는 짧게 말해야 하는데, KBS의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 해설자는 언제나 '사-자'라고 길게 말한다. 오래 전에 필자가 한 번 그 잘못을 지적했는데도 고치지 않고 있다. '사'자를 길게 말하면 '死者'와 '使者'가 된다.

    -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가장 기본 되는 지식은 국어에 관한 것이다.

    44) 우리말의 강세음(强勢音, 액센트)

    우리말에는 영어에서처럼 액센트나 억양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전연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몇 가지 예를 들면, '새끼'라고 쓰는 말도 발음의 강세에 따라 두 가지 다른 뜻의 말이 된다. 즉 '새끼'의 '새'에 강세(액센트)를 주어 발음하면 어린 짐승을 나타내는 말이 되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짚으로 꼰 줄(예: 새끼줄)을 나타낸다. 또한 '우리'라고 쓰는 말도 '우'자에 강세를 더하면 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곳(예: 돼지 우리)을 뜻하지만, 강세가 없는 경우에는 제1인칭 복수(예: '우리 나라'의 '우리')를 나타내는 말이 된다.

    성경 어휘 중의 '유월절'(逾越節, 영어: The Passover)이란 말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절기로서 '유월'의 뜻은 '뛰어넘는다'는 것인데, 이것을 읽거나 말할 때 '유'자의 발음에 강세를 나타내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경우는 '추월'(追越)의 '추'에 강세를 넣어 말하는 것과 같이 강세를 넣어야 하는 것이다.

    - 우리말에서 강세는 영어만큼 중요하지는 않아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45) 순 우리말과 한자 취음

    우리나라가 세계에 유례가 없는 훌륭한 한글을 만들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 오랫동안 그 글자를 '언문'(諺文, '속된 글')으로 천대하고 한문자를 숭상한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말의 한자 취음(取音)이 한 뚜렷한 증거가 된다.

    취음이란 순우리말을 같은 발음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 한자를 취하여 한자를 숭배하고 애호하는 사람들이 우리말로 잘못 알고 쓴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생각'을 '生覺'으로, '수고'를 '受苦'로, '우레'를 '雨雷' 로, '차꼬'를 '着錮'로 쓰는 것 등이다. 그러나 위의 네 낱말은 결코 한자로 쓸 수 있는 한자어가 아니라 순우리말인 것이다. 이러한 예는 위에 든 말 외에도 '간직'(看直), '억지'(臆志), '기운'(氣運), '곡식'(穀食), '노염'(老焰) 등 많다. 이러한 말은 국어사전에도 병기(竝記)로 한자가 올려 있지 않으며, 어떤 사전에는 취음(약자: '취')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이 점에 대한 더 자세한 것은 나채운 지음, "우리말 성경연구" 395-404면 참조).

    - 순 우리말을 안 쓰고 한자 취음을 하는 것은 악화로 양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46) 우리말에서의 말하기와 다른 띄어 쓰기

    글을 쓰는데 띄어쓰기를 바로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그 띄어쓰기가 실제로 하는 말과 일치하지 않은 것은 흔히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사례는 더러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말을 할 때는 "... 할뻔 하였다"라고 하면서 쓰기는 "... 할 뻔하였다"라고 쓴다. "... 할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하면서 쓰기는 "...할 수밖에 없다"로 띄어 쓴다.

    이러한 띄어쓰기는 실제로 말하는 것과 문법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문법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려운 것이다.

    - 언중(言衆)이 말하는 실제대로 띄어쓰기의 문법을 바꿀 수는 없을까?

    47) '대부분의 사람' 아닌 '대다수의 사람'

    어느 나라의 말에도 수량과 분량과 높고 낮음, 넓고 좁음, 깊고 얕음, 길고 짧음 등 여러 가지 정도를 나타내는 데는 각기 바른 대응어(對應語)를 써야 하는데 사람들 가운데는 흔히 그 구별을 잘못 해서 개념의 혼동을 일으키는 일이 많다. 그러한 예의 하나가 '작다'(小) 와 '적다'(少) 를 구별하지 못 하는 경우이다. 우리말 발음이 비슷한 것처럼 한문자의 발음도 동일한 것(소)이 그 한 가지 이유가 되는지는 몰라도 그 두 말의 뜻이 같지 않은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것 중 거의 모든 사람이 잘못 말하고 있는 한 가지는 '대부분의 사람'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많고 적음은 수(數)로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이라고 해야지 '대부분의 사람'이란 될 수가 없다. 영어로 말하면 'most' 라는 말이 수에도 양에도 다 쓰이지만(예: the most people 또는 the most part 등) 우리말로는 '대부분의 사람'은 어법상 성립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두 가지를 구별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 하는 경우와 "오늘 대부분의 지방에서 비가 온다" 로 그 다름을 볼 수 있다.

    - 언어에 대한 감각이 웬만큼 있으면 이 정도는 스스로 알 수 있지 않을까?.

    48) '하나도' 와 '조금도'

    이 두말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잘못 쓰고 있다. 역시 '하나도'는 수를 나타내는 말인데 대해, '조금도' 는 정도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라는 말(수사)은 많은 대상에 걸쳐 수를 나타내는 말로서, 사람인 경우에는 '한 사람'이 되고, 과일을 말할 때는 '한 개'가 되고, 자동차를 말할 때는 '한 대'가 되는 등 다양하게 쓰이며, '조금'이라는 말도 정도를 나타내는 말(명사, 부사 등)로는 물질의 적은 분량(예: 돈이 조금 있다), 시간의 짧음(예: 조금 기다려), 그 외 다양하게 쓰이나 수를 나타내는 말은 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쓸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다"는 되지만, "오늘은 하나도 안 춥다"라는 말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오늘은 조금도 안 춥다"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말이 위의 수와 정도를 다 나타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의 말은 하나도 믿을 수가 없다"라고 할 때, 그 사람의 여러 말 가운데 한 가지도 믿을 수 없다는 말이 되는 동시에, 그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이 신실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최소한의 정도도 믿을 수 없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 이러한 말들은 조금만 자세히 생각하면 그 잘못된 것을 알 수가 있다.

    49) '한나라당'의 바른 읽기와 말하기

    우리나라의 제일 야당인 '한나라당'을 뜻으로나 말하기로나 잘못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아마 바로 말하는 사람보다 잘못 말하는 사람이 훨씬 많으며, 심지어 한나라당 국회의원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은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한나라당'의 '한'은 결코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큰-'(大)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글'의 '한'이 '하나' '크다' '바르다'의 뜻을 가진 것(혹 한나라당에서 당명을 결정할 때 '한글'의 '한'을 원용했는지 모름) 중에서 '크다'의 뜻에 맞춘 것이다. 즉 한문자로 쓰면 '一國黨'이 아니고 '大國黨이'이 된다. 이러한 이해는 '한나라당'의 영어번역을 보면 분명하다. 즉 한나라당의 영어번역은 'one National Party' 가 아니고, 'Grand National Party'인 사실이다.

    - '한나라당'을 말할 때는 '한'에 강세(액센트)를 주어 발음해야 바른 읽기가 된다.

    50) '꾸다' 와 '빌리다'

    '꾸다'와 '빌리다'는 일부공통적인 의미가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구별을 하지 못 하고 쓰는 경우를 흔히 본다. 그러나 이 두 말은 분명히 다르다'

    '꾸다'는 다른 사람의 돈이나 소모품을 나중에 동일한 가치의 양이나 물품으로 갚기로 하고 자기가 사용하는 것인데 대해, '빌다'(빌리다)는 어떤 물건을 나중에 그대로 돌려주기로 하고 얼마 동안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요즘 '꾸다'는 말은 거의 쓰지 않고 그 두 가지 에 해당되는 행위를 '빌려쓰다'란 말로만 쓰는 경향이 많다. 예를 들면, 돈은 꾸어 쓰는 것이지 빌려쓰는 것이 아니다. 즉 돈은 꾸어 쓰는 것이므로 나중에 그 금액으로 갚으면 되는 데 대해 책을 빌어 쓸 때는 바로 그 책을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 돈은 꾸어서 쓰는 것이고, 책은 빌려서 보는 것이다.

    51) '첫째' 와 '첫번째' '첫째번' 과 '첫번'

    많은 사람들이 '첫째'와 '첫번째'를 구별하지 못 하고 , '첫째'라 해야 할 것을 '첫번째'라고 말을 잘못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말은 분명히 구별된다. '첫째'는 서수(序數, 차례를 나타내는 수. 한자로는 '第一')인데 대해 '첫번째'는 회수(回數)를 아울러 나타내는 서수라는 데 차이가 있다. 또 흔히 '첫(째)번'이나 '둘째번' 등의 용어를 쓰는데 이 말들은 서수를 아울러 나타내는 회수로 쓰는 말이다. 예를 들면,

    "오늘 할 국어공부는 첫째 바로 말하기, 둘째 바로쓰기이다"

    "우리 선수는 첫번 경기에서는 이겼으나 둘째번 경기에서는 졌다.

    - 조금 어렵기는 하나, 서수와 회수의 구별만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52) '피서'(避暑) 와 '피정'(避靜)의 다른 문법 구조

    대개의 경우가 그러하지만, 동사가 먼저 쓰이고 다음으로 명사가 이어질 때는 그 명사는 앞의 동사(타동사)의 목적격이 되는 법이다. 예컨대, '독서'는 책을 읽는다는 뜻이고, '등산'은 산을 오른다는 뜻이 되고, '피서'는 더위를 피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적인 원칙에 대하여 예외도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피정'이라는 말로서, 이는 조용한 곳을 피한다는 뜻이 아니라 도리어 조용한 곳을 찾아간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흔히 가톨릭교회 성도들이 소란한 세상을 피하여 조용한 수도원 같은 곳에 가서 기도나 명상을 하도록 세운 집을 일컬어 '피정의 집'이라 한다. 경북 왜관에 이러한 피정의 집이 있어 종종 사제(司祭)들이 모임을 갖는다. 이러한 집을 '피정'의 집이라 할 때, 그 말의 언어적인 분석은 '피한다'는 타동사에 붙은 '정'(靜)은 목적격이 아니라 장소를 나타내는 처격(處格)으로서, '조용한 곳으로'라는 뜻이다.
    - 인산인해를 이루는 피서지와 피정의 집은 정반대로 대조를 이루는 두 곳이다.

    53) 현재에 잘못 쓰는 '...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말을, 그것도 쉬운 말을 잘못 쓰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중의 하나가 현재의 사실을 말하면서 시제(時制)로는 미래형을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제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잘 들어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든가, 무슨 축하행사에 와서 본인을 만나 "선생님 축하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흔히 듣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시제를 잘못 말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바라는 바를 말하거나 하고 싶은 심정을 표현하는데 "...하기를 바라고 싶습니다"라는 애매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단순히 "... 을 바랍니다" 라 하든지, " ...을 하고 싶습니다" 하면 될 것을 어법상 맞지 않은 이중적인 표현을 하는 말이다.

    - 무엇을 바라거나 축하하는 일은 모두가 현재적인 표현을 해야 한다.

    54) 불확실의 시대에 언어도 불확실한 표현을 해야 하는가?

    언어는 시대를 따라 변하는 것이 사실이다. 강산은 10년 만에 변한다고 하지만 요즘 같은 고속화시대에는 언어도 속히 변하기 마련이지만, 오늘과 같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는 언어도 불확실하게 되어가는 것이 범상의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러한 언어현상 가운데 하나가 분명한 사실을 분명하지 못한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분명히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보면서 "참 아름다운 것 같애요" 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오래 전에는 전혀 들어볼 수 없었던 이러한 표현이 자연스레 나오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보고 아름답게 느껴졌으면 그대로 "참 아름다워요"라고 하면 될 것인데 어째서 "아름다운 것 같애요"라고 불확실성을 나타낼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 불확실한 시대에 확신이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의 심리적 현상을 말하는 것일까?


    VI. 우리말 영어표기 바로 쓰기

    우리말을 잘못 쓰는 것은 우리 글의 표기나 읽기만이 아니라 외국어의 번역이나 표기를 잘못 하는 것에도 나타난다. 영어에 관한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55) 영어의 지명 오역 - 미국의 지명을 우리말로 번역하는데 오류를 범하는 경우는 자주 있는 일이다. 그 중 한 예를 들면, 미국 New Jersey 주의 Atlantic City 를 번역하는데, '애틀랜틱 시'라고 번역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 된 것이다. 그것에 대한 바른 번역은 '애틀랜틱 시티 시'라고 해야 옳다. 왜냐하면 'Atlantic City' 가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거기에 '시'(city)라는 보통명사를 붙이려면 별도로 추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Mexico City 에서도 볼 수 있다.

    - 특별히 언론기관이나 방송매체에서는 영어에 대한 지식 있는 사람을 써야 한다.

    56) '힐튼'과 '쉐라톤' 의 다른 표기

    서울의 Hilton 호텔과 Sheraton 호텔의 끝음절 ton 에 대한 우리말 표기가 달라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영어의 ton 에 대한 우리말의 맞는 표기는 '턴'인데, 전자는 '-튼'을 쓰고, 후자는 '-톤'을 쓰고 있다. 그러나 '힐튼'은 외래어 표기법을 떠나 현지(미국)의 발음으로는 옳다.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턴'이다).

    다른 한편 미국의 Princeton 은 현지에서의 발음은 '-턴'이 아니고 '-튼'이다. '쉐라톤'은 '-ton'에 대해서도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She-'에 대한 표기도 잘못되어 있다. 'She-'에 대한 정확한 표기는 '쉐'가 아니고 '셰'가 바른 표기이다. '쉐'에 대한 영어 표기를 한다면 'She'가 아니고 'Swe'가 된다. 한 가지 증거를 든다면, Shakespeare 에 대한 우리말 표기는 '쉐익스피어'가 아니고 '셰익스피어'이다.

    - 외국어를 음역하는 데는 국어에 대한 상당한 전문지식이 필요하다.

    57) 교통표지판의 틀린 영어 - 교통표지판 등에 외국어를 잘못 쓰고 있는 경우는 외국인들에게 우리 정부나 국민들의 민도가 낮은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이다. 필자는 지난 2002년 6월 월드컵 경기가 우리나라에서 열리기 전에 전국적으로 도로 표지판에 영어가 잘못 쓰인 것을 들어,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무식을 보이지 않게 시정하도록 당국에 알리고 건설부장관에게까지 권고의 글을 보낸 바 있었으나, 일부가 수용되었을 뿐 아직도 거의 시정되지 않고 있다. 당시(2001년11월 10일) 필자가 건설부장관에게 시정을 요구한 내용 일부를 들면 '네거리'와 '접합점'(또는 분기점)에 관한 것이다.

    '네거리'는 영어로 intersection 이라 해야 할 것을 모두가 junction 으로 잘못 되어 있다. 예컨대 '광화문 네거리'나 '잠실 네거리' 등에서 '네거리'를 junction 으로 잘못 쓰고 있는 것이다. 서울 시내 일부 지역에서는 Intersection 으로 바로 쓰고 있는 곳도 있다. 월드컵 때 광화문 네거리의 Junction 이라는 표지판은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 intersection 으로 바꾸지는 않고, 아예 문제가 되는 것을 제거해 버린 듯 없어졌다. 그러나 서울 시내의 곳곳을 보니, '네거리' 라는 영어표기를 Junction 과 intersection 으로 혼용을 하고 있어 전혀 통일성을 결하고 있다.

    한편 junction 은 고가도로로 된 접속이나 또는 삼거리 접속 (T junction 이나 Y junction) 지점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분명히 '네거리' 와는 다른 것이다(T 나 Y Junction 은 삼거리이지 네거리가 아니다).

    - 영어 표지판이 잘못된 것은 외국인에게 우리나라의 문화수준이 낮음을 보이는 것이다.

    58) '터널'에 대한 영어 표기

    터널에 대한 표지(標識)를 우리말로 표기하는데도 '제1터널' '제2터널' 등을 '1 Tunnel' '2 Tunnel'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Tunnel 1' 'Tunnel 2' 로 하는 것이 바른 표기이다. 남산 제1터널, 치악 제1, 제2, 제3, 제4 터널 등 모두가 잘못 되어 있다. 그것과는 달리 전철에서는 '3호선' '5호선' 등을 'Line 3'(읽기: Line number three) "Line 5' 등으로 바로 되어 있다. 한 번 중부고속도로를 가다가 우연히 '치악 터널' 에 대한 영어 표지판이 잘못 되어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치악 1번 터널' 을 영어로 표기하기를 'Chiak 1 Tunnel' 이라 하고 있는데, 이 영어 표기는 잘못된 것이고, 정확한 표기는 'Chiak Tunnel #1' 이라고 해야 한다. 그 바른 읽기도 영어로는 'Chiak one Tunnel' 이나 'Chiak number one Tunnel' 이 될 수 없고, 'Chiak Tunnel one' 또는 'Chiak Tunnel number one' 으로 말해야 한다. (도로 표지로는 Chiak Tunnel #1 으로 하면 된다). 이 잘못도 2002년 월드컵 경기 전에 고치도록(외국 사람들에게 그 잘못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정부 당국(당시 건설부 장관)에게 의견을 말한 바 있으나 아직도 고치지 않은 채 있다.

    - 영어를 지나치게 많이 쓰면서 이 만큼 잘못 쓰는 것이 많은 것은 한 역현상이다.

    59) 영어의 이중 자음에 대한 우리말 표기

    영어의 이중 자음에 대한 표기를 우리 글자로도 이중 자음으로 오랫동안 잘못 써오던 것이 일부 바른 표기로 바뀌어가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사람이 이중 자음으로 잘못 쓰고 있다. 예를 들면 summer 를 '서머' 아닌 '섬머'로, dilemma 를 '딜레마' 아닌 '딜렘마'로, mammon 을 '마몬'이 아닌 '맘몬'으로 표기한 것 등이다.

    - 영어를 바로 알지 못하면 그 우리말 음역이 잘못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60) 영어와는 전연 다른 뜻으로 잘못 쓰는 말

    많은 사람이 시험부정행위를 영어로 말할 때 '컨닝'(cunning) 이라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영어의 뜻은 '교활한')이요, 바른 말은 cheating ('속임'이란 뜻)이다.

    - 이런 잘못된 말을 바로잡는 것은 실제적인 영어교육이 필요함을 증언하는 것이다.


    맺는 말

    이상과 같은 사실을 두고 볼 때, 우리말을 잘못 쓰고 있는 현상은 참으로 심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일제가 자기정당화를 위해서 거짓으로 만들어 쓴 말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분별없이 그대로 따라 쓰고 있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어찌 수십 년 전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성적인 모욕과 학대를 당한 오늘의 할머니들을 보고, 일본인들이 거짓으로 꾸며 쓴 그 말 ‘종군위안부’를 따라 쓸 수 있는가? 물론 많은 사람들은 몰라서 그렇게 쓰고 있다. 심지어 할머니들 자신들도 그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지식인들(예: 국어학자들)만은 그것을 바로잡아 주어야 하지 않은가? 전국의 많은 국어학자와 영문학자들이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두고 일반인들이 몰라서 잘못 쓰고 있는 말들을 바로잡아 주는 것은 그들이 꼭 맡아서 해야 할 큰 사명 아닌가? 하도 답답하여 전적으로 국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전공: 성서학, 부전공: 국어학)가 부족한 소견을 펴 본 것이다. 이러한 우리말 바로쓰기 운동을 우리나라의 전 학자들과 언론 방송 매체들이 총동원하여 추진한다면 불원간 시정될 수 있을 것인데.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을 따라 필자가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반을 해 놓은 이일이 곧 다 완성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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