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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천구 문화재
    TOUR(Climbing) 2012. 4. 12. 23:31

    문화재

    한우물 제2우물지
    한우물 제2우물지 사진

    한우물은 금천구 시흥동 산93-2 호암산 정상 (해발 315m)에 위치하고 있다. 한우물은 용보(龍洑) 또는 용추(龍湫)라고 했다. 통일 신라시대 (6 ~ 7세기경) 축조되었다가 조선시대에 서쪽으로 약간 이동하여 다시 축조되었다. 통일 신라시대는 그 규모가 동서 17.8m, 남북 13.6m, 깊이 2.5m이며, 조선 시대에 축조된 우물은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였다.
    이 우물은 가뭄 때는 기우제를 지내고 전쟁 중에는 군사용으로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때 한국의 장군 선거이가 진을 가지고 행주산성의 권율 장군과 함께 외군과 전투하면서 이 우물을 군사용수로 사용하였고, "동국 여지 승람“에는 ”호암산에 옛 성이 있고, 그 성안에는 한 못이 있어 날씨가 가물면 비오기를 빌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가뭄 시에는 기우제를 하였던 것으로 엿보인다. 한편, 조선조 건국 설화와 관련하여 방화용 설도 있다. 그리고 "제 2 우물지"는 한우물에서 동남 방향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남북 18.5m, 동서 10m, 깊이 2m 것으로 1990 년의 발굴 결과 밝혀졌다가 아직 복원되지 없다. 산 정상에 있는데 항상 물의 양이 일정 맑고 있기 때문에 신비를 느낀다.

    순흥안씨 양도공파묘역
    순홍안씨 양도공파묘역 사진

    순흥안씨 양도공파 묘역은 고려말 조선시대에 축조되었으며 금천구 시흥동 산 126-1에 소재하고 있다. 이 곳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인 양도공(良度公) 안경공(安景恭: 1347~1421)을 비롯한 그 후손들의 묘 3기가 있고, 묘 이외에도 조선시대 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사람들에게 세워 준 신도비(神道碑) 3기가 있다. 또한 문인의 형상을 본뜬 문관석(文官石)과 무인의 형상을 하고 있는 무관석(武官石)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사이에 불을 밝히는 장명등(長明燈)이 세워져 있다. 이 곳은 한 집안의 여러 무덤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조선초기의 분묘제도를 연구하는 자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호암산성터
    호암산성터 사진

    산성터의 평면 형태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인데 해발325m 능선을 따라 축조한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이며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축성한 것으로 성벽의 총 길이는 1,250m 가량으로 추정된다. 산성이 오랜 기간 방치되어 지금은 약 300m의 성벽만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호암산성의 축성 목적과 시기를 알려주는 직접적인 문헌자료는 없지만 산성 발굴 조사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유적과 산성이 위치한 입지조건, 지형을 근거로 하여 관련문헌자료와 비교한 결과 축성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12년경으로 신라가 나․당 전쟁시 한강을 넘어 수원으로 넘어가는 육로와 남양만으로 침입하는 해로를 효과적으로 방어, 공격하기 위하여 세운 요새로 추정하고 있다.

    석구상
    석구상 사진

    한우물 동북방 50m 지점에 동물석상이 1구 있는데, 이것이 일반인에게는 조선 왕조의 도읍 설화와 관련된 해태상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석상은 경복궁의 해태와 마주보는 위치에 놓아 관악산의 화기를 누름으로써 서울 장안의 화재를 막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석상의 형상이 해태로 보기보다는 개의 형상에 가깝고,
    경기읍지(1956년) 등의 기록에 따르면 석구상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싶다. 형상의 크기는 길이1.7m, 폭0.9m, 높이1.0m 가량으로 석상기법이 세밀하고 사실적이어서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으며 발과 꼬리 부분 또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석약사 불좌상
    석약사 불좌상 사진

    석약사 불좌상은 금천구 시흥2동 234에있는 호압사의 약사전에 있습니다. 제작 년대는 16세기 무렵 (추정) 재질은 석재로 높이 102㎝, 어깨 36㎝, 무릎 폭 56㎝로 2000년 4월 1 일 서울특별시 문화재 자료 제 8 호로 지정되었다. 석약사 불좌상은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낮고 부처님의 머리카락은 세세하게 표현되었으며 얼굴은 넓은 사각형으로 약간 볼륨이 표현되고 있어 고려말 조선 초기의 양식이나 얼굴과 무릎 부분의 손상으로 금칠을 보수했다.

    호압사
    호압사 사진

    금천구 시흥2동 234번지에 있는 호압사는 조선조 태조 2년, 임금의 명에 의해 문맹 대사가 창건 이래 1841 년에 수축하고 1935 년에 다시 약사 전 6 사이를 개축 했다. 금천구에서 유일한 전통 있는 사원, 호압사는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태조가 조선을 세우고 궁전을 건설 때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여러 번 지은 궁전이 무너져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둠 속에 반은 호랑이, 절반은 어떤 모습 모르는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 눈에서 불을 내뿜으며 건물태우려고 했다.
    태조가 괴물에게 화살을 쏘라고 하였고, 화살은 빗발처럼 쏟아졌으나 괴물은 아랑곳없이 궁궐을 무너뜨리고 사라졌다. 

    태조가 침통한 마음으로 침실에 들어갔을 때 어디선가 “한양은 비할 데 없이 좋은 도읍지로다"라는 노인의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태조가 깜짝 놀라 "누군가"고 물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장군이 걱정하고 계신 것을 해결해 드리려고 왔습니다"고 말했다. 태조가 어떤 좋은 생각이 있냐고 묻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에 있는 산 봉우리를 가르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깜짝 목소리를 높였다. "호랑이이다! 그 호랑이의 머리를 산봉우리가 한양 (한양)을 내려다보고있다."이라며 태조는 노인에 그 산 봉우리의 기운을 봉인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말했다.
    노인은 "호랑이는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는 짐승이기 때문에 저렇게 호랑이 모양의 산 봉우리의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롭다"고 말했다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 다음날부터 여기에 절을 지어 “호압사"라고 명명했다.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김소월시집 진달래꽃사진

    1925년 12월 26일 매문사(賣文社)에서 발행한 시집 '진달래꽃'은 시인 김소월(金素月, 본명 : 廷湜, 1902.8.6~1934.12.24)이 생전에 발간한 초판본 시집으로 토속적, 전통적 정서를 절제된 가락 속에 담은 시 작품을 많이 수록한 점이 고려되어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진달래꽃'은 소월의 사후에도 여러 출판사에 의해 시집이 발간될 정도로 우리 민족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품의 하나로 손꼽히며, 이 시집에는 고대 시가인 '가시리'와 '아리랑'의 맥을 잇는 이별가의 백미인 '진달래꽃'을 비롯하여 '먼후일',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초혼' 등 주옥같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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